어제 금요일 저녁 청년들과 ‘세상의 고통의 문제’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하나님이 왜 인간을 만드셨는지에 대해서 부터 고통이 있는 이유, 고통의 결말, 고통을 대하는 크리스챤의 태도 등 여러가지 주제들에 대해 이야기를 했는데, 마지막은 우리의 고통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같이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고통받으며 죽어가셨을 때 하나님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에 대한 생각이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이 과연 고통 받을 수 있는가에 대한 신학적 토론이 중세부터 이어져 왔던 것으로 압니다.
종교개혁 이전의 알렉산드리아의 필로, 안셀무스,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불변성은 무감각성을 포함한다고 생각했고, 따라서 하나님은 감정적 변화등을 겪음으로 불변성을 꺠뜨리시는 분이 아니므로 하나님은 고통을 바라보시지만 “고통받지 않으신다” (또는 “고난받지 않으신다”)고 주장했습니다.
반면 종교개혁을 일으킨 마틴 루터는 그의 ‘십자의 신학’에서 ‘고통을 당하며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라는 표현 대신 ‘고통을 당하며 십자가에 못박히신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사용함을써 분명하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통을 같이 지신 하나님을 주장했습니다.
감리교의 창시자인 요한 웨슬레도 “고통당할 수 없는 그 분이 고난을 겪으시고 죽을 수 없는 분이 죽으신다”라는 표현을 통해 고통을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이야기 했습니다.
현대 신학자인 위르겐 몰트만은 성부와 성자가 같이 고난을 당하지만 그 고난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경험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아들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이라는 고난을 겪으며 성부 아버지는 아들을 잃어버리는 고난을 겪는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성자 하나님의 죽음 속에 숨어 계신 성부 하나님은 아파하시는 하나님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아픔은 성자 하나님의 아픔이거나 성부 하나님 만의 아픔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하나인 두 위격의 아픔이다.”라고 주장했습니다.
하나님은 감정적 동요를 일으키는 분이 아니라는 주장과 인간처럼 감정을 가지고 인간의 고통을 같이 나누시는 분이라는 주장 모두가 있지만 저의 개인적인 생각은 종교개혁 이후의 신학자들의 의견처럼 하나님도 고통받는 자식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심적 고통을 같이 겪으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고통은 오늘 날까지도 인간 때문에 계속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로 인하여 고통받으시는 하나님, 그 분이 제가 생각하는 하나님이십니다.
(※ 전자의 신학적 견해를 찬성하시는 분들은 그냥 저의 개인적 의견임을 감안하시고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2003년 체코에서 만들어진 단편영화인 ‘MOST’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다른 나라에서 상영되면서 ‘The Bridge”’라는 제목으로 소개되기도 했습니다.
쳥년들과 고통의 이야기를 나누면서 마지막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히시도록 놔두신 하나님의 심정은 마치 ‘MOST’에 나오는 아버지 심정이었을 것 같다는 의견을 나누며 영화를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 영화를 소개해 드립니다.
간단하게 요약한 7분정도의 버전과 청년들과 같이 본 나레이션이 입혀진 18분 전체분량의 버전 두가지를 올려드립니다.,
맨 마지막에 아이의 아버지가 함박웃으며 하늘로 두 팔을 치켜들며 영화는 끝납니다.
우리가 진실로 회심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을 때 바로 하나님은 이러실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박광신 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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