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32:1-2, 5)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
때때로 되지도 않을 생각을 품을 때가 있습니다.
“내가 지은 죄를 하나님이 모르셨으면 좋겠다.”
그러나 우리 모두 그것은 불가능한 생각인 줄 압니다.
코람 데오(라틴어: Coram Deo) - “하나님 앞에서”
이 말처럼 우리를 우리보다 더 잘아시고,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을 모두 보시며, 멀리서도 우리의 생각을 아시는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우리가 아무 것도 숨길 수 없다는 것을 잘압니다.
(시편 139:1-4)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시편 139:6-8)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살아오면서 지은 많은 죄들을 생각하면 차마 하나님 앞에서 얼굴을 들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감히 뻔뻔하지만 죄를 자복하고 회개를 합니다.
시편 32:2절에 표현된, 마음에 ‘간사함이 없이’ 하는 회개를 하나님은 언제나 받아주시는 줄 알았기에 뻔뻔하지만 회개를 하고 하나님을 찾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우리의 믿음은 ‘뻔뻔함’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 분의 외아들을 십자가에 죽게 만든 자가 뻔뻔하게 그 분에게 용서를 구하고 오히려 복을 구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뻔뻔함을 하나님께서 용납하시고, 원하시고, 바라시기 때문에 우리가 뻔뻔한 얼굴을 들고 그 분께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 앞에서 가끔 내가 하는 회개가 ‘간사함이 없이 하는 회개’ 인가 의심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냥 습관적으로 하는 회개, 예배시간의 한 순서로 뜻없이 하는 회개, 진정으로 회개하지 않으면서 내심 억지로 하는 회개가 아닌가 스스로 의심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런 회개라면 스스로 나와 하나님을 속이려는 ‘간사한 회개’일 것 같습니다.
저의 확고한 생각 중에 하나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바로 우리의 ‘진심’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저의 신앙생활의 언제나 가장 중심에 있는 것은 단어는 ‘진심’입니다.
성경 전체를 관통하여,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것이 바로 우리의 ‘진심’이라고 언젠가 부터 생각하기 시작했고 여전히 그 생각은 더욱 더 굳어져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매일 아침 기도할 때마다 저의 진심만을 받아달라고 기도하게 됩니다.
우리의 사랑을 원하시는 하나님께서 ‘진심의 사랑’을 원하시고, 우리의 회개를 원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진심의 회개’를 원하신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시편 32편을 읽으면서 ‘간사함이 없는 마음’이라는 것이 바로 ‘진심’이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늘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진심으로 대하셨는데 우리의 진심은 이렇듯 간사함의 때가 묻어있습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시고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탁한 마음 속에서도 작고 작지만 우리의 진심을 보아주시고, 그 진심을 너그럽게 받아주시옵소서.
뻔뻔하지만 “산들이 떠나며 언덕들은 옮겨질지라도 나의 자비는 네게서 떠나지 아니하며 나의 화평의 언약은 흔들리지 아니하리라.”(이사야 54:10)하신 아버지의 말씀을 의지하고 아버지 앞으로 나아갑니다.
우리에게 간사함이 없는 마음을 주시옵시고 늘 진심으로 아버지와 함께하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박광신 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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