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7:17-18)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이 구절의 해석에서 ‘나무’와 ‘열매’를 여러가지 비유로 해석을 하지만, 그 중 제가 좋아하는 해석은 ‘나무’를 ‘믿음’으로, ‘열매’를 ‘행위’로 생각하는 해석입니다.
좋은 나무는 좋은 믿음을 가진 크리스챤이고, 좋은 믿음을 가진 크리스챤은 선한 행위, 즉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믿음과 행위는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이 믿음과 행위, 이 두 요소가 때때로 구원의 문제와 연결되어 ‘믿음으로 구원 받는냐?’와 ‘행위로 구원 받는냐?”의 교리싸움으로 전개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제 생각에는 이 말씀은 믿음과 행위의 분리를 거부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좋은 믿음은 좋은 행위인 ‘선한 행위’와 분리되지 않는 동일체이고 나쁜 믿음은 악한 행위와 분리될 수 없는, 마치 공동운명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의 구원이냐, 행위로의 구원이냐’하는 문제는 이 분리할 수 없는 두 가지를 분리해서 보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오류적 논쟁이지 싶습니다.
제 생각에는 좋은 열매, 즉 선한 행위는 먼저 좋은 나무, 즉 좋은 믿음 아래서 얻을 수 있는 2차적인 결과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우선 순위는 ‘열매’가 아니라 ‘나무’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말해 좋은 믿음을 갖는 것이 우선이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좋은믿음을 갖게되면 좋은 행위가 따라온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믿음으로구원받는다”는 것이 불변의 진리라고 생각됩니다. 행위는 믿음에 따라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때로 믿음을 강조하고 때로는 행위를 강조합니다.
때로 성경이 “행위로 구원받는다”고 하더라도 결국 그 말은 “믿음으로 구원받는다”와 그래서 동일한 말이 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가 행위를 강조하며 ‘행위구원론’을 말하는 것 같이 여겨져서, 심지어 마틴 루터 조차 야고보서를 ‘지프라기 성경’이라고 폄하 하기도 했지만, 결국 야고보서는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진리를 왜곡한 것이 아니라 믿음의 결과로 따라오는 행위를 점검하고, 자신이 온전한 믿음 위에 서있는지, 아니면 위태한 믿음 위에 서있는지를 점검하라는 메세지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야고보서 2:17-18절은 바로 이 핵심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성령을 받고 참 믿음의 상태로 더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죄에 대해 민감해지고, 혹시 죄를 범했을 때 그 괴로움은 믿음이 없었을 때 같은 일을 행했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워집니다.
그 고통이 괴롭고 힘들기 때문에 차라리 죄를 짓지 않고 고통에 빠지지 않는 길을 선택하게 됩니다.
이러한 현상은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말씀을 명확히 증명합니다.
때로 현재 교회의 타락이 만연한 것은 설교자들이 교회에서 행위를 강조하는 설교를 많이 하지 않아서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순서가 틀렸다고 생각됩니다.
믿음을 강조하고, 어떻게든 성도들을 회심시키고 거듭나서 참 믿음에 들어가도록 하는 노력이 부족했기 때문이지 행위를 가르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교회가 온전한 믿음 위에 선다면 타락을 그렇게 쉽게 할 수는 없습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은 최고의 집중을 성도의 회심과 회심 후 성령충만에 두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좋은 나무를 만드는데 집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거듭난 참 믿음이 모든 것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박광신 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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