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댓글필수참조
<탕자의 비유에 숨어있는 무서운 뜻>
(누가복음 15: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누가복음 15:30)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누가복음의 이 말씀 바로 앞에 잃어버린 양의 비유와 잃어버린 드라크마의 비유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비유는 좀 더 묵상을 해보면, 양을 잃어버린 목자와 드라크마를 잃어버린 여자는 사실 자신들의 관리 잘 못으로 양을 잃어버렸고 드라크마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잘 못을 후회하고, 그리고 어찌되었든 잃어버린 양을 찾으려고 애쓰고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으려고 애써서 결국 양을 찾고 드라크마를 찾았습니다.
이 목자와 여자를 보통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로 생각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이 인물들은 오히려 성도들을 돌보고 양육하는 사역자들이나 신앙의 연륜이 있는 직분있는 성도들을 가리키는 말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떤 우리의 잘 못으로 또는 실수로, 기존 교인이나 새신자들에게 실망을 주고 그들이 교회를, 또는 신앙을 떠나게 만들었다면, 그 한사람을 양처럼, 드라크마 처럼 귀하게 여기고 다시 교회로, 신앙으로 돌아오도록 양잃은 목자처럼, 드라크마 잃은 여자처럼 애를써야 한다는 가르침이 아닐까 싶습니다.
만약 나로 인해 어떤 사람이 실족하고 교회를 떠났다면 나는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 나오는 연자맷돌의 저주를 받을 수 밖에 없는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참으로 성도들에게 조심하고 선하게 대해야하며, 그들이 신앙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탕자의 비유의 말씀은 좀 다릅니다.
탕자의 아버지는 하나님 아버지일 수 밖에 없고, 다른 해석으로 이 말씀을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리고 탕자는 하나님을 떠나 세상에 휩쓸린 불신자나 배교자일 수 있습니다.
믿음의 모양은 가졌으나 실제 믿음이 없어, 진정한 회심의 기회를 얻지 못하고 세상에 휩쓸려버린, 겉으로만의 신자였던 사람들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탕자의 아버지는 둘 째 아들이 타국에 가서 허랑방탕하게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았던 것 같습니다.
누가복음 15:30에, 첫 째 아들이 돌아온 탕자가 어떻게 살았는지 알지않느냐 하며 항의를 아버지에게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것은 탕자의 아버지가 타국에서 둘 째 아들이 엉망진창으로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어 알고 있었으면서도 결코 그 아들을 찾으러 가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100마리의 양을 놔두고 떠났던 목자와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으려고 등불을 켜고 빗자루를 들고 온 집안을 쓸며 드라크마를 찾았던 여자와 다른 모습입니다.
아버지는 탕자가 돌아오기를 문앞에서 기다리기는 했지만 그 아들을 찾으러 떠나지는 않았습니다.
이 것은 우리가 타락하고 하나님을 떠났더라도 우리가 회개하고 탕자처럼 돌아오기를 하나님은 기다리실 지라도, 탕자가 타락의 삶을 살던 타국까지 탕자의 아버지가 찾아오지는 않은 것 처럼, 하나님도 우리의 타락의 자리까지 일부러 오진 않으신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탕자는 스스로 자신의 비참한 삶을 되돌아 보고 그 때서야 아버지를 기억했습니다.
하나님도 우리가 타락의 삶에 빠져있을 때 직접 개입하지 않으시고 스스로 하나님을 기억하고 되돌아오기를 기다리신다는 생각이 듭니다.
요한계시록 22장 11절에 아주 무서운 말씀이 있습니다.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하게 하라”
어쩌면 이 말씀 처럼 하나님은 그냥 우리를 내버려 두시는지 모릅니다.
돌아오기를 탕자의 아버지처럼 기다리고 기다리시지만, 탕자를 직접 찾아가진 않으신 것 처럼 말입니다.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은 탕자처럼 우리 스스로의 책임이지 하나님의 책임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문 밖에서 문을 두드리고 계시지만 문을 부수고 들어오지는 않으십니다.
돌아오기를 기다리시고, 문을 열어주기를 기다리시는 하나님. . . .
문을 여는것은 우리의 할일이자 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하나님 아버지께 저는 매일 돌아가고 또 돌아가고 싶습니다.
아버지께 돌아가는 길인 성경과 예배와 기도의 길을, 성령님의 도우심 가운데 걸으며 또 걷기를 기도합니다.
- 이상복 전도사님이 댓글과 함께 올려주신 찬양
이상복 전도사
집사님 묵상을 나눠주신거에 너무 감사드립니다. 새롭게 세가지 비유를 묵상하며, 오늘 일을 하며, 마음이 참 무거워짐을 느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의 비유에 대해서는 참 다양한 설교와 주석을 찾아볼수 있습니다.
집사님이 나눠주신것처럼 양 잃어버린 목자와 드라크마를 잃어버린 여인을 잃어버린것들에 대한 하나님의 아버지에 대한 비유로 보아야 하는 것이 좀더 비유의 방향과 맞는거 같습니다.
그리고 그 이 두 비유에서 좀더 확장하여, 잃어버린 아들에 대한 비유속에 집사님이 지적하신 직분자와 성도는 바로, 형님이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특히 잃어버린 아들은 창세기 37장에 나오는 야곱의 이야기가 떠오르지 않을수 없을거 같습니다.
창 37장 34절-35절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오래도록 그 아들을 위하여 애통하니 35그 모든 자녀가 위로하되 그가 그 위로를 받지 아니하여 가로되 내가 슬퍼하며 음부에 내려 아들에게로 가리라 하고 그 아비가 그를 위하여 울었더라
복음의 핵심은 바로,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을 찾으시고 회복하시기 원하시는 그 사랑이 아닐까 해서입니다.
모세를 보내시고, 선지자를 보내, 제사장을 세우시고, 계속해서 돌아오라고 눈물 흘리시는 하나님 아버지, 결국에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요.
하지만, 잃어버린 양의 비유에서 99마리의 양과는 달리 탕자의 비유에는 바로 “다른 아들”이 나오고 있는것이지요.
매일 저녁마다 혹시 아들이 돌아올까 기다리는 아버지를 보고, 첫째 아들은 무엇을 느꼈을까요?
아버지의 살림을 허비한 아들을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시는 아버지를 향하여, 원망하는것을 보면,
큰 아들은 자기의 동생을 위해서, 길을 나서는것조차 아깝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말입니다.
우리도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탕자들을 보며, 혹시 정죄하고, 그들과 달리 나는 아버지의 일을 열심히 하고 있다고 나 스스로를 정당화 하고 있지는 않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야곱처럼, 하나님은 저희들에게 그 잃어버린자들(나의 이웃, 소외된 자들, 복음이 없어 방황하는 자들)을 향하여 아버지의 마음을 전하라고 사명을 주신것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저희들 되어지기 원합니다.
(박광신 집사)
전도사님 글을 읽고 “아! 그렇지. 하나님은 우리를 찾으러 오셨다.”하고 깨달았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이 그 때문이었지”하고 바보스럽게 무릎을 쳤습니다.
하나님은 결국 오셨던 거였어요.
탕자의 아버지보다 더 적극적이셨던 거예요.
하인들을 보내신 것이 아니라 직접 탕자의 처지로 변하셔서 오신거였어요.
한마리의 양을 찾으러 간 목자가 하나님이셨고, 빗자루로 온 집을 쓸며 드라크마를 찾던 여인이 바로 하나님이셨어요.
단편만 보던 저에게 다른 편을 보여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전도사님.
이래서 나눔이 너무 중요한 것 같습니다.
머리에서 돌 깨지는 소리가들리는 것 같습니다.
계속 귀한 나눔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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