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덴의 바울>
(사도행전 17:17-19)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장터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변론하니
어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냐 하고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부활을 전하기 때문이러라. 그를 붙들어 아레오바고로 가며 말하기를 네가 말하는 이 새로운 가르침이 무엇인지 우리가 알 수 있겠느냐”
바울은 예수님과 복음을 전하기 위해 아덴(아테네)에서 유대인들과 쟁론하고, 또 에피쿠로스 학파와 스토아 학파의 철학자들과 쟁론하였습니다.
철학자들은 논리를 생명처럼 여기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철학의 방법이 논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탄탄한 논리로 바울과 쟁론을 벌였을 거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과 맞서서 쟁론하고 예수님과 부활을 전한 바울은 그들보다 더 강한 논리로 무장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아덴의 유명한 토론장소인 아레오바고 바위언덕의 한 가운데 서서 내로라하는 아덴의 철학자들과 복음을 들고 한 판 승부를 벌였습니다. 그리고 그 유명한 ‘알지 못하는 신’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전합니다.
얼마나 바울의 논쟁이 설득력이 있었는지, 아레오바고를 관리하는 디오누시오를 비롯한 아덴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입니다.
이런 상황을 보면 바울은 이성적으로 예수님을 변증할 준비가 철저히 되어 있었던 전도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도 이러한 이성적으로 예수님과 복음의 진리를 변증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감정이 아닌 이성으로 이해하는 믿음을 가져야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때때로 이성의 믿음은 의심으로 부터, 질문으로 부터 완성됩니다.
교회 외부에서 무신론자들이 던지는 질문들이 우리의 의심에 불을 지릅니다.
또 신앙생활 가운데 우리 스스로 생기는 질문들이 우리를 괴롭힙니다.
그러나 이러한 질문들을 스스로에게, 또 교회에 던지고 그 해답을 찾아야만 합니다.
그 해답을 찾고 이성으로 이해했을 때 정말 믿음이 견고해지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바울시대는 물론 2000년이 지난 오늘 날까지 얼마나 많은 도전적 질문들이 기독교에 쏟아졌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덴의 바울처럼 기독교는 탄탄한 논리위에서 오늘 날까지 튼튼히 서왔습니다.
그리하여 감정적 믿음이 아닌 이성과 지성 위에 복음을 세우고 아레오바고 위의 바울처럼 세상을 향하여 복음을 변증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러한 바울을 닮으려는 교회가 너무나 적고, 사역자가 너무나 적은 이 시대가 안타까울 뿐입니다.
이러한 이성적 믿음을 경험하지 못한 젊은 세대가 교회를 떠나는 이유는, 이러한 그들의 질문들에 대해 교회와 교회의 기성세대가 답을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난다, 더 이상 교회에 오지 않는다고 안타까워 하면서도 그 해결을 하지못하고 있는 것은 교회가, 교회의 기성세대가 그 답을 줄 준비가 안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젊은이들이 이러한 질문을 해오면, 자신도 그 답을 해 줄 능력이 없으니까 그저, “그냥 기도해. 그러면 알게될거야”, “그런걸 왜 알려고 해. 믿음은 따지고 믿는 것이 아니야.”, “성경을 열심히 읽어. 그러면 저절로 깨닫게 돼.” 등, 자신도 안되는 말을 스스로를 속이면서 서슴없이 합니다.
“야, 좋은 질문인데. 안그래도 나도 그 답을 찾아보고 있었어. 생각한게 있기는 한데 지금 정리가 잘 안되어 있네. 어때 다음 주에 한 번 내가 정리하고 나서 같이 다시 이야기 해볼까?”
정도는 말할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답을 찾아 볼 노력 정도는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해답의 모습을 저는 오늘 아레오바고 위의 바울에게서 찾아봅니다.
이러한 젊은이들이 오늘 날 교회에 던지는 질문들과 쟁론하는 바울, 아덴의 철학자들과 쟁론했던 그 바울을 오늘 날 우리의 젊은이들 앞에 다시금 우리를 통해 소환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아레오바고의 바울을 오늘 날 우리가 재현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감정적인 믿음은 사실 위태합니다.
우리는 구원의 은혜를 받았어도 도마 처럼 의심하고, 다윗 처럼 무너집니다.
감정적인 믿음은 벼랑 끝에 선 눈먼 산양과 같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이성으로 확인된 믿음은 세찬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는 뿌리 깊은 나무와 같습니다.
마음과 이성이 합하여 견고해진 믿음이 우리를 의심으로 부터, 실족함으로 부터 지켜줍니다.
그 견고함 뒤에 계시는 성령님의 도우심과 함께.
우리 젊은이들이 이러한 이성의 믿음을 세웠을 때, 세상에 대해 자신의 믿음에 대한 자신감,자존감을 갖게 되고, 세상에 자신이 크리스챤임을 당당하게 밝힐 수 있으며, 교회를 다니는 것이 자랑스럽고 복되다는 것을 확신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 밖에서 던지는 질문, 스스로 가지게 된 신앙에 관한 질문들을 자유롭게 물어보고 답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는 [금요기초교리반] 입니다.
모두 [금요기초교리반]에 참석해서 그러한 이성적 믿음을 세워나가는 기회를 갖기를 바랍니다.
아덴의 바울을 닮아가는 우리들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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