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의 친구들이 멈추어야 했던 때>

(욥기 2:12-13)

“눈을 들어 멀리 보매 그가 욥인 줄 알기 어렵게 되었으므로 그들이 일제히 소리 질러 울며 각각 자기의 겉옷을 찢고 하늘을 향하여 티끌을 날려 자기 머리에 뿌리고 밤낮 칠 일 동안 그와 함께 땅에 앉았으나 욥의 고통이 심함을 보므로 그에게 한마디도 말하는 자가 없었더라” 

 

 

욥의 불행과 고통을 보고 욥의 세 친구가 욥을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욥의 고통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겉옷을 찢고 티끌을 뒤집어 쓰며 욥의 고통에 참여하였습니다.

 

칠 일 동안 그렇게 욥의 고통을 함께하는 친구들을 보며 욥은 아마도 큰 위로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칠 일이 지나자 욥의 친구들은 갑자기 변모합니다.

데만 사람 엘리바스를 시작으로 욥을 앉혀놓고 정죄하기 시작합니다.

욥의 고통의 원인을 분석하며 욥을 가르치려 들기 시작합니다.

그 때 욥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칠 일 동안 아무 말 없이 자신과 고통을 함께 해주던 친구들이 갑자기 욥의 죄를 들먹이며 훈계하는 모습으로 변했을 때 욥은 얼마나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을까요?

 

사실 고통 당하는 사람에게 조언하는 건 별로 쓸모가 없다는 생각입니다.

“고통이 너를 연단시켜 주고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 줄거야”

“고통의 끝에 낙이 온다”,  “잘 될려고 그러는 거야”, “고통에는 뜻이 있어” 

이런 이야기들을 많이 합니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들이 정작 고통받는 사람에게 그렇게 위안이 되지 않습니다.

특히 우리가 큰 실수를 하는 것 중에 하나가 “너보다 더 고통스러운 사람들, 그 사람들을 봐야 돼”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이 상대적인 행복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 기독교인들이 참 주의해야 됩니다.

“그런 고통과 불행한 사람 속에서 나는 그래도 행복해” 

이거는 전혀 기독교 적이거나 성경적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또 고통을 당하는 사람을 위로 한답시고 찾아가서 율법적 감사를 하는 모습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데살로니가전서 5:18절,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를 이유로 무조건 율법을 지키는 것 처럼 감사하려고 합니다.

 

예전에 한국 영화중 “그놈 목소리”라고 하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하나 뿐인 아이를 납치당하고 납치범의 협박 속에서 고통을 당하는 교회 여집사의 집에 교회 목사와 몇 명의 신도들이 찾아 왔습니다. 그 위로의 자리에서 목사는 이렇게 기도 합니다.

“우리에게 고난을 주신 것도 감사합니다.”

그 기도를 듣던 남편(설경구 분)은 “아이가 납치된 것이 감사하다고?”하며 분노하여 벽에 걸린 십자가를 뜯어내어 박살을 냅니다.

 

이것은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을 참으로 바리새인들이 억지로 율법을 지키는 것과 같이 하는 억지스러운 감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고통 속에서의 감사는 오직 고통 당하는 당사자만이 할 수 있는 감사입니다.

남이 대신할 수 없는 감사입니다.

 

두 아들을 공산주의자 손에 잃은 손양원 목사님이 두 아들의 장례식에서 10가지의 감사를 합니다.

 

“첫째, 나 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의 자식들이 나오게 하셨으니 하나님 감사합니다.

둘째, 허다한 많은 성도들 중에 어찌 이런 보배들을 주께서 하필 내게 맡겨주셨는지 그 점 또한 주님 감사합니다.

셋째, 3남 3녀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두 아들 장자와 차자를 바치게 된 나의 축복을 하나님 감사합니다.

넷째, 한 아들의 순교도 귀하다 하거늘 하물며 두 아들의 순교이리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다섯째, 예수 믿다가 누워 죽는 것도 큰 복이라 하거늘 하물며 전도하다 총살 순교 당함이리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여섯째, 미국 유학 가려고 준비하던 내 아들, 미국보다 더 좋은 천국에 갔으니 내 마음이 안심되어, 하나님 감사합니다.

일곱째, 나의 사랑하는 두 아들을 총살한 원수를 회개시켜 내 아들 삼고자 하는 사랑의 마음을 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여덟째, 내 두 아들의 순교로 말미암아 무수한 천국의 아들들이 생길 것이 믿어지니 우리 하나님 감사합니다.

아홉째, 이 같은 역경 중에서도 이상 여덟 가지 진리와 하나님 사랑을 찾는 기쁜 마음, 여유 있는 믿음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합니다.

열 번째, 이렇듯 과분한 축복 누리게 되는 것을 감사합니다.”

 

장례예배는 눈물바다를 이루었습니다. 하지만 손 목사님은 슬퍼하기보다 “영광일세 영광일세 내가 누릴 영광일세”하고 찬송을 힘차게 불렀습니다.

그리고 두 아들을 죽인 살인자를 양아들로 삼아 그의 삶을 도와주었습니다.

양아들이 된 그 사람은 평생을 죽은 듯이 살았으며 그의 아들은 지금 훌륭한 목회자가 되어있습니다.

 

이렇듯 고통 중에서의 감사는 오직 고통 당한 당사자가 하는 감사입니다.

우리가 그래서 함부로 남의 고통을 대신 감사하는 실수를 하지 않아야 합니다.

다만 우리는 로마서 12:15절 말씀 처럼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것’이 필요할 뿐입니다.

 

욥의 세 친구는 욥에게 찾아와서 칠 일 동안 아무 말없이 욥과 함꼐 고통을 나눔으로 욥을 위로 했습니다. 그들은 거기서 끝내야 했습니다.

 

어설픈 위로조차 위로가 안되는 마당에 그들은 멈추지 않고 오히려 욥을 정죄하며 몰아세우기 시작합니다. 그들이 욥보다 하나님을 더 잘아는 것 처럼 하나님의 대변인이 되어 욥을 질책하며 회개하라고 몰아세웁니다.

 

우리는 때때로 우리에게 고통을 준 당사자 보다 그를 변호하는 사람 때문에 더 화가 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욥의 세 친구가 이와 같습니다.

마치 하나님을 대변하는 듯한 모습으로 욥을 질책하니 욥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욥이 친구들은 칠 일의 위로 후에 떠났어야 했습니다.

그랬다면 욥에게 세 친구의 위로가 참으로 힘이 되었을 겁니다.

우리도 욥의 세 친구의 칠 일의 위로에서 더 나아가지 않았으면 합니다.

같이 웃고 같이 우는 위로의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저 스스로도 다시금 생각해봅니다.

(박광신 집사)

 

※ 욥기는 새번역 성경을 참고하시면 좋을 듯 합니다. 개역개정의 어려운 문구보다 훨씬 쉽게 상황을 이해할 수 있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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