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소망은 주께>

(시편 39:5-7)
“주께서 나의 날을 한 뼘 길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은 그가 든든히 서 있는 때에도 진실로 모두가 허사뿐이니이다.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로 소란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거둘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천체물리학자들이 말하는 지구의 나이는 45억년이고 빅뱅으로 탄생한 우주의 나이는 138억년 입니다. 거기에 비해 우리의 인생은 100년을 채워 살기 어렵습니다.
지구의 나이와 또 우주의 나이와 비교하면 우리의 인생은 번쩍하는 한 순간의 찰라와 같습니다.
나의 일생이 주 앞에는 없는 것 같다”는 시편기자의 말 처럼 영원하신 하나님을 생각하면 이 땅에서의 우리의 삶은 그저 순식간에 사라지는 안개와 같습니다.

 

그 한 순간의 짧은 인생을 살면서 우리는 영원히 살 것 같은 착각 속에서, 돈을 벌려고 애쓰고 출세하려고 발버둥치며 남보다 더 우위에 서려고 몸부림을 칩니다.
그러나 그러한 삶의 모습은 그저 손에 잡히지 않는 신기루와 같습니다.
우리는 신기루를 쫓아가며 시편 38:17 “내가 넘어지게 되었고 나의 근심이 항상 내 앞에 있사오니” 말씀처럼 근심과 걱정 속에서 허우적 거립니다.


정신없이 살다가 문득 이런 삶의 모습이 실없이 요란하기만 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로 소란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거둘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라고 말하는 시편기자의 그런 심정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주일학교 여선생님이 아이들에게 휴지 두루말이를 들고 가르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한 아이로 하여급 교회 단상에서 통로를 따라 두루말이를 일자로 풀어보라고 했습니다.
그 아이는 그 휴지 두루말이를 단상에서 교회 본당 출입구까지 풀어갔습니다. 그러나 출입구까지 풀었음에서 두루말이는 다 풀리지 않았습니다.
그 때 여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우리가 이 땅에서 사는 것은 휴지 두루말이의 처음 한 뼘과 같고 후에 천국에서 살아갈 삶은 나머지 두루말이의 부분과 같은데 결코 두루말이가 끝나지 않는 Endless 두루말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도 하나님과 같이 살아갈 진짜 Life를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이 가르침 처럼 우리의 소망을 이 땅에 두고 사는 것보다 하늘에 두고 사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시편기자도 그래서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라고 고백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시선을 하늘에 두고 사는 것이 잘 되지 않습니다.
아마도 우리의 연약함 때문일 겁니다.
시편을 읽을 때 마다 시편기자 역시 우리처럼 삶의 고단함에, 삶의 근심과 걱정에 휩싸여 고통 받는 것을 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그의 시선을 땅에서 하늘로 돌리려고 애를 씁니다.
세상 속의 삶은 그의 시선을 땅으로 끌어내리려고 하고, 그는 그 시선을 하늘로, 하나님께로 돌리려고 분투합니다.
시편의 거의 모든 장이 이렇듯 시선을 하나님께 돌리려는 시편 기자의 몸부림 같습니다.
꼭 저의 모습과 같습니다.

그렇지만 시편기자는 그 마지막은 결국 천국에 있을 것이라는 소망을 놓치지 않습니다.
그것이 그의 위로가 되고 희망이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시편 149:4절에서 시편기자는 그의 소망을 말합니다.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기뻐하시며 겸손한 자를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심이로다

결국 시편의 마지막 편, 마지막 절에서 시편기자는 이 소망의 끝에 계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시편 150:6)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

오늘도 이 시편 마지막 장, 마지막 절의 고백이 오늘 하루를 끝맺을 때 우리의 고백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박광신 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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