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어려운 신정론의 문제중에 하나는 하나님의 폭력에 대한 문제입니다.
구약에는 ‘헤렘’이라고 부르는 ‘진멸의 명령’이 있습니다.
신명기 7: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 넘겨주시며 네가 그들을 치리니 너는 그들을 진멸할 것이며 그들과 무약을 맺지 말며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지 말며"
여호수아 6:17: "그 성과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은 여호와께 바치되..."
사무엘상 15:3: "이제 가서 아말렉 사람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김없이 진멸하되 남녀와 유아와 젖 먹는 아이와 소와 양과 낙타와 나귀를 다 죽이라 하셨나이다."
민수기 21:2-3: "이스라엘이 여호와께 서원하여 이르되 주께서 만일 이 백성을 내 손에 넘겨주시면 내가 그들의 성읍들을 진멸하리이다 하니..."
인간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이 명령들은 너무나 무자비하고 비도덕적인 명령으로 느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특히 “유아와 젖 먹는 아이와 소와 양과 낙타와 나귀를 다 죽이라”는 사무엘상 15:3의 말씀은 너무나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우리가 대개 가지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이미지는 사랑과 자비가 끝없는 인자한 할아버지와 같은 이미지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고 있는 하나님의 또 다른 이미지는 매우 준엄하시고 엄위하시며 냉정하신 무서운 하나님입니다.
우리에게는 두 가지의 선택이 있습니다.
사랑과 자비가 끝없는 인자한 할아버지와 같은 하나님 품에 안기느냐 아니면 준엄하시고 엄위하시며 냉정하신 무서운 하나님의 손으로 떨어지느냐 입니다.
복음을 믿는 우리는 사실 무서운 하나님을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구원을 받은 자 앞에는 오직 한 없는 사랑과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만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미 우리에게는 무서운 하나님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그저 어리광부리며 품을 파고들 수 있는 인자한 하나님만이 계신 것입니다.
인간이 보기에 하나님은 양극단을 가지고 계신 분 처럼 보이기도합니다.
그 분의 극진한 사랑에 속할 것인지, 준엄한 심판에 속할 것인지는 우리의 선택에 달려있습니다.
하나님의 준엄하심을 무자비하다, 비윤리적이다라며 비판하면서 그 분의 극진한 사랑을 포기한다면 그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습니다.
헤렘은 사실 오직 하나님만이 내리실 수 있는 명령입니다.
그 분이 창조주이시며 모든 생명의 권리를 가지고 계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인간이 헤렘을 명령했다면 그는 분명 잔인한 사람이요 비도덕적인 사람일 것입니다.
어떤 인간이든 인간에 대한 생명의 권리를 가진 인간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헤렘의 자격이 없는 인간이 다른 인간에 대해 헤렘을 행한다면 그는 정죄 받아 마땅합니다.
수 백만명의 유태인을 학살한 히틀러가 인류의 최악의 빌런이 되어있는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헤렘을 명령하신 것을 인간이 비도덕적이다, 비윤리적이다 라고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잣대를 하나님에게 대려고 하는 무모한 행동입니다.
그것은 논리적으로 합당하지 않습니다.
특정한 시기, 특정한 대상에게만 내려진 헤렘의 명령은 하나님의 권리이고 우리가 가늠할 수 없는 하나님의 높으신 생각의 결론입니다.
인간이 판단할 수 있는 수준의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길을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로마서 11:33)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그런데 우리가 쉽게 생각하지 못하는 또 하나의 하나님의 이미지가 있습니다.
후회하시고 슬퍼하시며 돌이키시는 하나님입니다.
창세기 6:6: "여호와께서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사무엘상 15:11: "내가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노니..."
출애굽기 32:14: "여호와께서 그 뜻을 돌이키사 말씀하신 재앙을 그 백성에게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사무엘하 24:16: "천사가 예루살렘을 멸하려 하던 때에 여호와께서 이 재앙 내리심을 뉘우치사 백성을 멸하는 천사에게 이르시되 족하다 이제 네 손을 거두라 하시니..."
예레미야 26:19: "유다 왕 히스기야와 모든 유다가 그를 죽였느냐? 히스기야가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며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선포한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셨지 아니하였느냐?"
요나 3:10: "하나님이 그들의 행위를 보시고 그들이 악한 길에서 돌이킴을 보시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하나님은 선악과를 따먹고 죄를 지은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축출하셨지만 그 둘을 불쌍히 여기시고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 분입니다.
인류 최대의 헤렘이었던 노아홍수를 일으키셔서 노아가족 외의 모든 인류를 진멸하셨던 하나님이 무지개를 띄우시면서 다시는 이런 심판을 하지 않으시겠다고 후회하시는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그 무지개는 인간에게 보여주시려는 표징이 아니라 하나님 스스로 그 무지개를 보시면서 다시는 그런 심판을 하지 않으리라 다짐하시는 하나님 스스로를 위한 표징이라고 언젠가부터 생각이 들었습니다.
존 칼빈이 말한 5가지 강령중에 “성도의 견인’ 교리가 있습니다.
견인(堅忍)은 굳셀 ‘견’에 참을 ‘인’자입니다.
‘성도의 견인’ 이라고 표현되어 있지만 그 뜻은 하나님이 인간을 참고 견디고 인내하신다는 뜻입니다.
인간이 끝없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악을 저지르지만 그 인간을 하나님이 참고 인내로 견디고 계신다는 의미입니다.
노아홍수 이후로 오늘 날까지 하나님은 인간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며 끝없이 참고 인내하고 계신 것이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제2의 노아홍수를 일으키시고 이 악한 세상을 다시 리셋시키실 수 있으심에도 불구하고 무지개가 뜰 때마다 스스로 포기하시는 하나님을 상상해봅니다.
최근 한국의 백향나무교회 목사이면서 느헤미야기족연구원 교수인 배덕만 교수의 이야기를 들었는데 동료 신학교 교수 한 분이 십자가가 이러한 구약의 폭력적인 하나님의 후회의 상징이라는 내용의 글을 썼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 이야기의 원문을 소개합니다. (동영상 첨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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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최근에 저희 학교에서 책을 한 권 선생님들과 쓰고 있는데, 여러 전공의 교수들이 비슷한 주제에 대해서 자기 영역에서 글을 쓰셨습니다. 제가 이제 그걸 다 마지막 편집하는 작업을 제가 맡아서 하고 있는데, 흥미롭게 두 명의 구약 교수들이 글을 쓰셨는데 그 분들의 그 책의 주제가 하나님의 이 폭력, 구약 성경에 하나님의 이름으로 명령된 “진멸하라” 라고 하는 이 단어를 그대로 실행했던 역사를 우리가 어떻게 오늘날 받아들여야 될 것인가 라는 갖고 논문을 쓰셨더라고요.
저도 이런 본문을 들고 와서 “목사님 어떻게 돼요? 뭐 기독교가 평화의 종교, 사랑의 종교라고 말하는데, 걸핏하면 다 잡아 죽이라고 하고, 그리고 안 죽였더니 오히려 안 죽였다고 또 성질내시고, 이거 어떻게 받아들여야 돼요?” 라는 질문을 받을 때 정말 제가 답변하기 어려웠는데, 저만 괴로운 게 아니라 그걸로 밥 먹고 계시는 분들도 다 힘들어 했더라고요.
이 본문을 설명하기 위한 수많은 논쟁들이 있었고 책도 무지무지 많은데, 그래서 어떤 분은 “그거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한 거니까 우리가 그냥 그대로 순종이 된다”라고 주장하는 구약학자도 계시고, “이거는 원래 하나님은 그런 뜻으로 말 안 했는데 애들이 말귀를 못알아 들어가지고 지들 마음대로 애들을 팬거다. 이렇게 원래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다.” 라고 주장하신 분도 계셨고, 하나는 “신약의 이름으로 구약을 새롭게 해야 되기 때문에 구약의 하나님은 못되신 하나님이니까, 그거는 지금 본받으면 안 된다. 예수님 이후로 세상이 바뀌었다.” 뭐 이렇게 얘기하는 분도 계셨는데, 제가 어제 읽었던 논문을 쓰신 교수님이 매우 흥미로운 얘기를 하셨어요.
성경에도 하나님이 일을 벌이시고 나중에 후회하셨다라고 하는 이야기들이 종종 나오죠. 또 하나님이 마음을 바꾸셨다라는 얘기도 나옵니다.
대표적인 것이 인류를 물로 진노하셔서 다 죽이고 난 다음에,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라고 약속하셨고, 그 더 앞에 가면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고 나서, 사람들이 사고치고 그러니까 “주께서 사람을 창조하시는 것을 후회하셨다” 이런 표현도 구약 성경에 나오잖아요?
그래서 하나님이 당신이 일을 하시고 나서도 당신 뜻과 반대로 세상이 흘러갔을 때 후회하셔서 계획과 마음을 바꾸신 경우가 종종 있구요.
그래서 그 교수님이 뭐라고 그러셨냐면 신약 성경에서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은 하나님께서 인류를 이렇게 성질 나셔가지고 막 줘패시고 난 다음에, 매우 후회하시고 인간에게 미언해 하셨다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를 십자가에 다신 것은 하나님이 인류를 향해 “미안해”라고 하신 사과인 것 같다 그렇게 얘기를 하셨더라고요.
그것을 읽다가 참 여러 가지 생각들을 했습니다.
물론 다 설명이 되는 건 아니지만, 그래서 하나님이 그 전에도 I'm sorry 하신 적이 여러 번 계시는데, 가장 큰 I'm sorry는 십자가에서 당신이 죽으심으로 “내가 다시는 안 때릴게, 다시는 그런 방법으로 너희들을 안 다룰게.” 라고 하는 하나님의 사과이면서 약속이다 이렇게 얘기를 하더라고요.
그분이 “내가 왜 이 생각을 하게 되었냐면. . . “ 이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어떤 분이 와가지고 자기가 교회를 어릴 때 다니다가 교회를 안 다니게 됐는데, 교회와 하나님에 대한 화가 많이 났다는 거예요. “이상한 종교다. 그래서 안 믿겠다.” 막 그러는데, “어떻게 하면 당신이 예수를 믿겠느냐?” 그랬더니 두 가지 얘기 했는데 하나는 그새 잊어먹었고, 하나가 하나님이 이 본문 이런 거, 하나님이 못되게 해가지고 그것 때문에 애들이 잘못 배워가지고 이라크도 치고 가고 십자군도 하고 낙태했다고 폭탄도 던지고 칼도 찌르는 이런 애들이 생겼는데, 나 이거 도대체 못 받아들이겠다. 하나님이 우리한테 사과하시면 내가 믿겠다.” 그랬대요.
그게 이제 몇 달 동안 자기 머릿속에 남아있었는데, “하나님이 사과하시면 믿겠다.” 이런 신성 모독이 어디 있어요?
그런데 가만히 읽어보니까 하나님이 사과를 종종 하셨더라는 거죠. 그러고 나서 십자가가 갑자기 그렇게 읽혀져서, 인류를 멸망하고 나서 무지개를 띄우셨던 하나님이 이번에는 자신의 아들을 자신이 직접 거기에 달리시면서 세상을 향해서 미안하다고 얘기를 하셨다는 것으로 받아들여 졌다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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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을 사랑하는 부모님이 자식을 매로 다스리다가 그 자식의 아파함을 보고 때린 것을 후회하면서 “아빠가 너무 심하게 해서 미안하다. 아빠 진심은 그런 거 아닌 거 알지? 네가 어떤 모습이더라도 너는 내 아들이고 나는 너를 사랑한단다.”
라는 말하는 것이 하나님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이라는 겁니다.
헤렘을 통해 보여주셨던 무서운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앞으로는 인자하신 하나님으로 우리를 대하시겠다고 약속을 하신 것 같습니다.
그리고 견디고 인내하시면서 인간들이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이미지를 우리에게 새롭게 보여주신 것 아닌가 싶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노아의 홍수를 덮고도 남습니다.
(박광신 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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