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치예복을 안 입은 자>

<잔치예복을 안 입은 자>
(마태복음 22:11-14)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하니라.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이 잔치 비유는 누가복음 4:21-24에도 나오는데 누가복음에서는 “큰 잔치” 비유로 나옵니다.
이 혼인찬치 이야기는 왕의 잔치에 사람들이 오지 않고 심지어 보낸 종들을 죽이자 그들을 진멸하고 그들 대신 길거리에서 아무나 잔치에 데리고와 잔치를 여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이 있자 그 사람을 밖으로 내쫒는 다는 이야기의 결말을 보여줍니다..
이 이야기는 의문을 갖게 만듭니다.
“길거리에서 갑자기 반강제로 데려온 사람들이 어떻게 예복을 갖출 수 있단 말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 서울장로회신학교 교수인 김호경교수는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해석을 그의 책 [예수가 하려던 말들]에서 알려줍니다.
김호경교수의 글을 그대로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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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치가 열리고 왕이 손님들을 만나러 들어가면서 문제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왕의 잔치에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 이 있었기 때문이다. 왕은 그를 그냥 지나치지 않고, “혼인 예복을 입지 않았는데, 어떻게 여기에 들어왔는가?"라고 묻는다. 왕의 이런 질문에 대해서 나는 종종 사람들에게 다시 묻는다. 이 사람이 도대쳬 어떤 옷을 입었기에 왕은 이런 질문을 했을까?
거의 모든 사람의 대답은 같다. 그는 잔치에 어울리지 않는 허름한 옷을 입고 있었고, 그러니 왕의 잔치에서 쫓겨나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런 대답은 또 다른 의문을 자아낸다.
길을 가다카 황급히 끌려오다시피 잔치에 참여한 사람에게 예복 운운하는 것이 무언가 이상하지 않은가?
선한 사람이든 악한 사람이든 가리지 않더니 좋은 옷을 입은 사람과 나쁜 옷을 입은 사람을 가린다는 것은 앞뒤가 안 맞는 것 아닌가?
아무 의심없이 그 사람이 더러운 옷을 입었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것은 문맥과 맞지 않는다.
이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고대의 관습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고대 사회의 관습에 따르면, 잔치에 필요한 예복은 잔치를 주최한 쪽에서 준비한다. 그러니 왕의 아들의 혼인 잔치에서도 왕은 손님들을 위한 예복을 준비했을 것이고, 길거리에서 불리어 온 모든 사람도 그 예복을 입고 잔치에 참며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왕의 잔치에 참며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남루한 모습을 염려할 필요가 없었다. 서로 다른 조건과 상황 가운데 있던 사람들이 똑같은 예복을 입음으로써, 그들은 왕 앞에서 드러내고 싶지 않은 모습을 감추고 동일한 자격을 획득한다. 왕이 주는 예복을 입는 것은 왕의 권위를 받아들인다는 표시다. 조건 없이 잔치에 참여한 그들에게 단 하나의 조건은 왕이 주는 예복을 입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왜 왕의 예복을 입지 않았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그는 아마도 자신의 옷에 왕의 예복 따위를 덧입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 사람이 남루한 옷을 입었을 것이라는 상상은 착각이다.
그는 아마 매우 멋친 옷올 입었을 것이고, 자신의 옷에 심취해 있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값비싼 옷을 가리는 왕의 예복을 입고 다른 사람과 똑같은 모습으로 잔치에 앉아 있는 상황을 참을 수 없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는 멋진 옷을 입고 흐뭇한 표정으로 자신의 높은 신분을 과시하며 왕을 맞이했을 것이다. 하지만 왕은 그를 내쫒는다. 그리고 그에게 남은 것은 끝나지 않을 슬픔 뿐이다 그는 멋진 옷 때문에 왕의 기쁨을 누릴 수 없었다.

누가복음의 큰 잔치 비유가 “누가 잔치에 참여할 수 있는가?”를 강조하고 있다면, 왕의 아들의 혼인 잔치 비유는 “누가 잔치에 참여할 수 없는가?”를 강조한다.
‘누가 잔치에 참여할 수 없는가?’에 대한 답은 분명하다. 잔치에는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잔치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의 조건은 없다. 그동안 있던 모든 제약과 관습은 파기되었다. 그러므로 잔치는 새 시대의 도래를 알린다.

‘누가 잔치에 참여할 수 없는가?’에 대한 딥도 분명하다.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잔치이지만, 잔치에 알맞는 예복을 입는다는 조건을 지켜야 한다.
그러나 사실 이 조건은 그리 어렵지 않다. 잔치에 참여하는 사람이 새롭게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저 주는 옷을 입기만 하면 된다. 그것도 싫다면 할 수 없다.

예복을 입지 않은 이 사람의 태도는 앞에서 언급한 상징적 폭력과 연관된다.
상징적 폭력이 궁극적으로 도달하는 것은 ‘구별 짓기’다.
구별 짓기는 자신의 특별한 양식으로 상대방을 차별하는 것이다. 너와 나는 다르다고 말하는 것이다. 누군가는 구별 짓기를 통해서 자신들의 취향과 문화를 바르고 정당한 것으로 만들며, 누군가는 이를 추앙한다. 누군가는 자신의 문화와 지위에 우월감을 느끼며, 누군가는 그 밖에서 좌절하고 절망한다.
자신들의 테두리 안으로 들어오려는 사람들을 막기 위한 끊임없는 발길질과, 거짓으로라도 그들 안으로 편입하려는 사람들의 피나는 노력 사이에는 거대한 장벽이 있다. 더 높은 곳에 편입되려는 온갖 몸부림과 그럼에도 ‘너는 올 수 없어’라고 말하는 누군가의 서늘한 눈초리가 겹쳐진다.
예복을 입지 않으려는 사람이 예복을 거부함으로써 지키려고 한 것은 지금까지 자신을 지켜 준 가치다. 그는 멋친 옷과 높은 신분으로 대우를 받아 왔고 스스로를 다른 사람과 구별함으로써 자신의 정쳬성을 유지했다.
예복을 거부한 것이 뭐가 그렇게 잘못된 일인가?
그는 그저 자신이 정당하다고 받아들인 것을 실현했을 뿐이다. 그는 명풍 옷과 높은 신분을 선(善)이라고 말하는 사회 속에서 그것을 누리며 살마왔을 뿐이다. 갑자기 오게 된 잔치에서 그는 이제껏 귀하게 여시고 지켜 온 것을 버릴 이유를 찾지 못했다.

그러나 문제는 잔지를 베푼 왕이 지금까지 당연하다고 생각하던 가치를 더 이상 당연한 가치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데 있다. 이미 왕을 거부한 사람들을 진멸시키면서, 왕은 이제 자신의 잔치를 새롭새 꾸미기로 작정했다. 왕의 방향이 바뀌었다.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은 왕이 바뀌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자신이 아무리 잘났다고 하더라도 그는 처음부터 왕의 잔치에 초대받을 정도의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이제라도 자신이 잔치에 올 수 있던 것이 멋진 옷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면 어땠을까. 자신에게 익숙한 가치로 왕과 기쁨을 나눌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있다면 그의 삶은 달라졌을 것이다.

왕은 스스로를 구별하며 다른 사람들과의 차이를 통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려는 사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들이 가치를 두는 것에 왕은 더 이상의 가치를 두지 않는다. 왕의 초대를 거부하는 사람을 보면서 왕은 정책을 바꾸었다.
왕이 진멸한 것은 자신들의 명예와 욕망으로 가득 찬 그들의 구별 짓기다. 그리고 이제 조건 없이 불러들인 사람들에게 새로운 질서를 요구한다. 길거리에서 불리어 온 사람들은 이전의 질서에서라면 왕의 면전에 설 수 없는사람들이다. 그러나 이제 왕은 그들을 부르고, 그들에게 예복을 입히며, 새로운 요구를 한다.
왕이 그들과 함께 만들어 갈 세상은 왕 앞에서 차별이 없는 곳이다. 모두에게 입혀 놓은 예복을 통해서, 그들을 하나로 만들고, 왕의 잔치에서 기쁨을 누리게 한다. 그 기쁨에 다른 조건은 없다. 하나님 나라 안에는 자신들의 잣대에 따른 구별 짓기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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