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 점검과 다시 시작하기 2]

[믿음 점검과 다시 시작하기 2]

우리가 믿음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 믿음이 아닌 것일 수도 있으며 그것을 ‘유사믿음’ 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런 유사믿음은 이런 것들이 아닐까?

 

(1) 신의 존재를 믿는다.
사실 이것은 우리 신앙의 출발점이다.
매우 매우 중요한 것이고 이것이 우리 신앙의 시작이다.
이것만큼 중요한 신앙의 요소도 없다. 그래서 이것만큼은 확고하고도 확실한 믿음을 가져야만 한다.

그런데 솔직히 사실 이것조차 어렴풋하다.
하나님이 계신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그렇다고 확실하게 자신있게 하나님은 이래서 계시다고 설명할 자신도 없다.
기껏 할 수 있는 말은 “나는 하나님이 계시다고 생각해요.” 하거나 “나는 하나님이 계신 것 같아요.” 하는 수준이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어쩌다가 하나님의 계심을 정말 믿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믿음의 다가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이 존재하심을 믿게 되었다면 이제 내가 진짜 믿음을 갖게 되었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것’과 ‘하나님을 믿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나는 우리 아빠를 믿어.”라고 말을 할 때 그것은 아빠가 존재하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다는 것에 머물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것은 우리 뿐만 아니다.
하나님이 적대시하는 악한 귀신들도 하나님의 존재를 알고 믿는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 순복하지 않고 하나님을 따르지 않는 악한 영들이다.

(마가복음 3:11, 새번역)
또 악한 귀신들은 예수를 보기만 하면, 그 앞에 엎드려서 외쳤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존재를 믿는 것은 당연하고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의미까지 포함되어 있다.
우리가 과연 하나님을 신뢰하고 내 삶의 전부를 맏기고 의지할 수 있는 믿음이 있는가? 는 생각해 보아야할 문제이다.
“나는 하나님을 믿어. 왜냐하면 하나님의 존재를 믿으니까.” 라고 말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온전한 믿음이 아니다.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것을 믿는 수준에서 그친다면 그것은 유사믿음일 가능성이 높다.

 

(2) 신의 가호를 믿는다.
이것은 하나님이 나를 지켜주실 것을 믿는다는 것이다.
항상 나를 안전하게 지켜주시고 앞으로도 내 삶을 보호해 주실 것으로 믿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으면 이 땅에서 안전하고 평안한 삶을 보장 받는다는 믿음이다.
그런 것을 믿기 때문에 자신이 하나님을 잘 믿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 자신은 안정감을 가지고 살 수 있기 때문에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라고 생각하고 나름 자신의 믿음은 그런대로 괜찮은 믿음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런 자기의 생각을 전도에도 활용하여 “하나님을 믿으면 모든 것이 잘된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것은 엄밀히 말하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 삶에 대한 신앙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이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의외로 이것이 자기 삶의 목표인 사람들이 많다.
“하나님을 믿으면 내 인생이 잘될 것으로 믿어.”
“하나님을 믿으면 건강할 줄로 믿어.” 등등.
그러나 이것을 실제 일반화 시킬 수는 없다.
정말 하나님을 믿으면 이 땅에서 좋은 삶을 보장 받을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그렇지 않게 생을 마감한 크리스챤들도 많다.
이런 말은 사고로 생을 마감한 크리스챤 유족 앞에서 할 수 없는 말이다.
분명히 우리는 이런 사건들을 많이 보아왔다.
세월호 사건, 코로나 등등.
코로나로 인해 많은 목사님과 선교사님들이 천국으로 떠났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주시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일반화, 법칙화 시킬 수는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요술램프 요정인 지니의 요정과 같은 분이 아니다. 하나님의 깊은 섭리 가운데서 우리를 때때로 고통 가운데 처하는 것을 허락하실 수 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선한 뜻 가운데서 말이다.
그런데 이런 것을 신앙의 근거라고 한다면 그건 무언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목적이 우리 삶의 안전을 보장하는 것인가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많은 사람들을 치료하셨다.
그렇다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사람들을 병에서 치료하려고 오신 것일까?
그렇다면 예수님은 실패하신 것이다.
치료해봐야 사실 몇 명이나 치료하셨겠는가? 이 세상에 아픈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말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분명히 그 이상의 목적이 있으신 것이다.
그래서 이런 것을 가지고 그것이 믿음이다 신앙이다 생각하는 것은 옳은 것이 아니다.
만약 이런 신의 가호가 없이 어떤 불행한 사건을 자신이 당하게 된다면 이런 믿음은 무너지기 쉽다.
그러나 신이 우리를 보호하여 주시기를, 평강의 길로 인도하여 주시기를 기도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나님꼐 우리의 연약함을 고백하고 삶의 발걸음을 인도하여 주시기를 기도하는 것은 우리의 믿는 자들의 당연한 모습이다.
문제는 하나님을 믿는 이유의 주 목적이 그러한 이유라면 그것이 온전한 믿음이겠냐는 것이다.
‘미리십일조’라는 것이 있다. 십일조는 몇 배로 되돌려준다는 약속이 있는 헌금이라고 가르치고 미리 얼마의 십일조를 내면 반드시 두 배 이상으로 되돌려 받는다고 하여 하는 헌금이다.
이게 과연 헌금인지 투자인지 구분이 안간다.
미국에서는 이 약속이 안 이루어졌다고 목사를 소송한 신도도 있었다.
전도 문구에 “예수 믿고 부자되세요”라는 문구도 본적 있다.
이런 것은 진짜 믿음이 아닌 유사 믿음이 확실하다.

 

(3) 신과의 교제
이것은 하나님과 교제를 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음과 같은 말을 교회에서 학생이나 청년에게 듣을 수 있다.
“내가 기도하면 하나님은 응답하십니다. 나를 지켜보시고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느낍니다. 전에는 몰랐는데 하나님이 그런 분이시라는 것을 내가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저와 항상 함께 하세요.”
그러 말을 하면 듣는 어른은 보통 이렇게 말할 것이다.
“아, 네가 드디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구나.”

이 말은 하나님이 안계신줄 알았는데 실제 살아계시고 내 기도를 들으시며 나를 위로하시고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이시라는 것을 알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느끼는 감정들이 주관적 해석일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학생이 학생담당 목사님에게 상담을 해 온 적이 있다고 한다.
어떻게 기도중에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냐고 교회 선배에게 물었더니 교회 선배는 기도중에 몸이 뜨거워질 때가 있는데 그 때가 하나님이 안아주시는 것이라고 했단다.
또는 기도하다가 환해지는 것을 느끼면 하나님이 같이 계시다는 것이란다.
그런데 이건 혹시 주변에서 갑자기 히터를 틀었거나 조명을 킨 것은 아닐까?
이것은 다분히 주관적인 자신의 감정일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감정은 사실 기독교인들 뿐만 아니라 타종교인들도 느끼는 감정이다.

 

어느 목사님이 말레이시아의 한 힌두교 사원을 간 적이 있었는데 힌두교 승려가 앞에서 마이크로 설법을 하고 있었고 그 안의 광경이 교회와 거의 똑같았다고 한다.
한 승려에게 힌두교에 대한 설명을 부탁하자 그가 이렇게 말하더란다.
“우리가 섬기는 신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며 내가 때로 잘못된 길로 갈 때 올바로 인도하시고 또 때로는 나를 벌하시기도 하고 그 신은 이 세상을 주관하시고 . . . . .”
이런 말을 듣고 그 목사님은 등에 소름이 올라오더라고 했다.
이런 말은 우리 교회에서나 쓰는 말인 줄 알았는데 똑같은 말을 그들도 쓰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후에 알아보니 이런 감정은 모든 종교가 가지고 있는 감정이었다는 것을 알았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신을 경배한다고 했을 때 어떤 느낌(feel)이 오고 거기에 대해 자기 주관적 해석을 해서 “나는 신과 교제하고 있어.”라고 생각하는 것은 교회말고도 어떤 종교에도 다 있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근거로 내가 하나님을 믿고있다고 생각한다면 뭔가 좀 위태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 하나님의 터치라고 한다면 그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알아가기 위해 힘써야 할 것인데 그냥 그 느낌만 즐기고 추구한다는 것이다.
만약 그것이 하나님의 실제 임재하심 이었다면 그 뜻은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싸인이었을 것이다. 즉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아가라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보다는 그저 그 느낌(Feeling)만 추구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경계하는 신비주의에 빠질 가능성이 있다.
우리가 그러한 느낌(Feeling)을 느낀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을 잘 알게되고 어떤 분인지 알게되는 것은 아니다.
믿음의 대상에 대해 잘 모르는 믿음은 진짜 믿음이라고 보기 어렵다.
내가 감정으로 믿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아니면 철저히 이성으로, 지성으로 이해하고 하나님을 믿고 있는 것인지 점검을 해보아야 하는 것이다.

 

(4) 나는 신념을 믿는다
이것은 “나는 그렇게 될 줄로 믿습니다.”같은 믿음이다.
그런 사람들을 우리는 보통 믿음이 좋다고 말한다.
A : “야, 너 중간고사 시험 공부 안하니?”
B : “어, 나는 열심히 기도해서 응답으로 중간고사 잘 몰것으로 믿어.”
A : “야 너 참 믿음이 좋구나.”

A : “너 여자친구 안사귀냐?”
B : “어, 나는 열심히 기도해서 응답으로 좋은 여자친구가 생기게 될 것을 믿어.”
A : “야 너 참 믿음이 좋구나.”

이런 식의 믿음을 믿음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것은 그냥 자기 신념에 대한 믿음일 뿐이다.

“~이 이루어 질꺼야.”하는 것은 얼핏 보면 하나님을 믿는 것 같지만 실상은 하나님을 자기 삶의 도움이 정도로 생각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역할이 그저 자기 삶을 도와주는 정도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라고 보기 어렵다.

 

결론
이러한 몇 가지 것들은 유사믿음이지 진정한 믿음이라고 보기 어렵다.
물론 이런 것들이 진정한 믿음으로 올라서기 위한 좋은 도움닫기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맞다.
이런 것을 통해서 하나님을 진정으로 바라보는 계기가 될 수는 있지만 어디까지나 그 역할은 도움닫기의 역할이지 그것이 진정한 믿음이라고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혹시 우리가 이러한 유사믿음의 상태에 머물러 있다면 이제는 이것을 넘어서야 할 때라는 것이다.
그래서 올바른 믿음이 무엇인지, 진정한 믿음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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