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 점검과 다시 시작하기 4]

[믿음 점검과 다시 시작하기 4]

3장. 어떤 믿음이 진짜인가?

오병이어 사건에서 무리들의 질문에 꾸중으로 대답하신 예수님에게 그들은 이어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였다.
(요한복음 6:28, 새번역)
그들이 예수께 물었다. “우리가 무엇을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됩니까?”


오병이어 현장의 사람들은 열심은 있었으나 그것이 제대로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이렇게 그들은 다시 질문을 한 것이다.
예수님은 제대로 믿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렇게 대답하셨다.


(요한복음 6:29, 새번역)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일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누구일까?(요한복음 6:35, 새번역)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내게로 오는 사람은 결코 주리지 않을 것이요, 나를 믿는 사람은 다시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이 바로 생명의 빵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믿으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내 생명의 빵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나한테 생명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먹을 빵이 있어야 되는데 예수님이 나에게 생명의 빵이 되셨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이 나의 구원이 되셨다는 것이다.
그것은 나의 영원한 영의 생명을 얻었다는 것이다. 지옥의 멸망이 아니라 예수님으로 인해서 천국의 생명을 얻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올바른 믿음은 “예수님은 나의 구원이시다.”라는 이 사실을 믿는 것이 진짜 믿음 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중에서 “예수님이 나의 구원이시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통해서 나를 구원하셨다.”는 것을 안믿는 사람이 있나?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과연 내가 정말 믿고 있는 것인지를 깊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리가 구원을 ‘알고 있는 것’과 ‘믿는 것’은 다르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나를 구원하셨다.” 그것이 기독교의 교리인 것은 안다.
그런데 진짜로 그것을 믿고 있는가 하는 것은 다른 이야기이다.
초대교회에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들이 구원을 받았을 때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일들이 일어났다.

1.예배
그들에게 예배에 대한 욕구가 넘치는 일이 일어났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 구원에 대해 너무나 감사함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그것을 표현하지 않고 참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 칼날의 위협 속에서도 어떻게든지 꾸역 꾸역 모였다.
심지어 그들은 지하무덤까지 파고 내려가 모여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그 속에서 예배를 드렸다.

2.헌신
그들은 자신들의 삶을 헌신했다.
각자의 직업을 가지고 있었지만 복음의 이야기를 기뻐하고 그 이야기를 전도하는데 자신들의 삶을 헌신하길 원했고 그것을 자신들의 삶의 목표로 생각했다.

3.순교
그리고 그들은 순교까지 했다.
이 복음이 너무 좋았고, 이 이야기를 부인하는 것이 너무 싫기 때문에 목숨까지 내 주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교회를 형성한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가 순교까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최소한 그 사람들이 느꼈을 그 감정을 우리도 느끼고 있는지 돌아 볼 필요가 있다.
왜 그들은 그렇게 까지 했을까?
이유는 하나다.
십자가 그 사건과 그 의미를 듣고 너무나 기뻤던 것이다.

우리는 정말 이런 기쁨을 가지고 있나?
나보고 그들처럼 그렇게 순교까지 하라면 못하겠지만 그 사람들이 가졌던 그 감정이 무엇인지는 알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드나?
아니면 그냥 그런가보다 라는 정도의 생각인가?
어렸을 때 부터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어요.” 하는 소리를 들어왔으니까, 익숙하니까, 하도 많이 들었으니까 그냥 그런가 보다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혹은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이 하신 많은 일중에 하나일 뿐 정도로 느껴지는 것은 아닌가?
만약 내가 이런 식으로 느껴진다면 순교까지 한 사람들이 믿고 있던 것과 같은 것을 내가 믿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우리가 믿지 않고 있다고 단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우리의 믿음을 점검해보자는 의미에서이다.
즉 복음을 아는 것인지, 아니면 복음을 믿는 것인지를 점검해 보자는 것이다.
이것을 점검해보기 위한 몇가지의 질문이 있다.

<점검질문>
1) 구원 없는 인생이 비참하다는 것에 동의하는가?
인류사에서 만약에 이 구원이 없었더라면 정말 큰일날 뻔 했을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는 사건이 없었다면 인류가 정말 그렇게 까지 불행했을까?
오늘 날 구원을 알고 있는 사람과 구원을 모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이 있다.
정말 구원을 모르고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삶이 비참하고 불쌍하게 느껴지나?
아마 우리 주변에 그 사람의 삶이 부러운 사람이 한명 이상은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사람들을 보면서 “그가 아무리 돈이 많고 이룬 것이 많지만 그는 구원을 모르기 때문에 비참해.” 라고 말을 할 수 있는가?
정말로 그 생각에 동의가 되는가?
만약에 여기에 동의가 안된다면 어쩌면 우리는 구원을 아직 잘 모르는 것일수도 있다.

2) 내가 죄인이라는 것에 동의하는가?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여기에 동의한다.
그런데 이 동의가 진심으로 하는 것일수도 있지만 사실 대부분은 어려서 부터 이것을 모범답안으로 배워왔다. 그리고 이것을 부정하기에는 나 자신에게 떠올려지는 악함도 좀 있기에 뭐 그런대로 동의를 하는 면이 있다. 또 죄인이 아니라고 하면 되게 교만해 보일 것이 뻔하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는 동의한다고 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질문을 약간 바꾸어서,
“당신이 뉴스에 나오는 조두순이나 연쇄살인범 유영철과 같은 범죄자들 처럼 그 정도로 나쁜 놈인가 ?” 하고 묻는다면 솔직히 그건 동의 하기가 어렵다.
대부분 사람들은 “내가 죄인이다.”라는 말을 어떤 것으로 여기냐 하면, “그래 내가 완벽한 사람은 아니지. 나는 부족한 면이 있지.” 이 정도로 여기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고 있는 ‘내가 죄인이다”라는 뜻은 그런 범죄자들과 똑같다는 것이다.
우리가 쓰레기나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찬송가중에 “만왕의 왕 내 주께서 왜 고초 당했나, 이 벌레같은 날 위해 …”라는 가사가 있다. 바로 우리가 벌레같은 놈이라는 것이다.
이것에 동의되지 않는다면 구원을 알고 있다고 말하기 어렵다.

3) 예수님 vs 이순신, 질적으로 다른 감사를 느끼는가?
우리는 이순신 장군에게 정말 감사한다.
우리를 위해 싸워주셨고 우리를 위해 죽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꼐도 우리는 똑같이 감사한다.
그런데 이 두 감사가 별차이 없이 비슷하게 느껴지지는 않는가?
솔직히 우리는 이순신 장군 때문에 아침마다 울지는 않는다. 왜? 그것은 역사 속의 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이러 이러 하게 나라를 위해서 싸워다는 내용을 들으면 “오, 감사한데.” 뭐 이 정도의 느낌 아닌가?
그런데 예수님의 사건도 그냥 과거의 역사적 사건의 하나처럼 그 정도로 느껴지는 것은 아닌가?
“과거에 나를 위해서 그랬대. 나를 위해서 죽었다고 하니까 일단 감사하다고 해야지 뭐.” 이러는 것은 아닌가?
교회에서 고난주간에 Passion of Christ 영화 장면를 보여주면서 “우리를 위해 이렇게 고난 당하신 예수님이 감사해요 안 감사해요?”하고 물으면 당연히 감사하다고 해야지 별 수 있게냐는 말이다.
그냥 과거에 일어났던 사건에 대한 감사로 기억한다면 예수님 사건이나 이순신 장군의 사건
이나 두 사건 모두 비슷한 느낌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그러면 안되는 것이다.
왜?
예수님 사건은 오늘 날 지금 나에게 실질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문제인 것이다. 괴거의 역사의 사건이 아니라 현재 나에게 일어나는 현재적 사건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분명 이순신 장군에 대한 감사보다 더 다른 감사를 느껴야만 한다.
그런데 그것을 느끼지 못한다면 이쩌면 아직 구원을 모르는 것일수도 있다.

 

Add comment

Comments

There are no comments yet.

Create Your Own Website With Webad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