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 점검과 다시 시작하기 5]
1) 감사기도 할 때 무엇을 제일 먼저 고백하는가?
우른 보통 감사기도를 할 때 ‘오늘 하루를 지켜주셔서, 가족을 지켜주셔서, 일용할 양식을 주셔서, 제 하루를 안전하게 지켜주셔서. . ‘.등등으로 감사기도를 한다.
그런데 이것은 무엇을 고백하고 있는것이냐 하면 우리한테 주어진 안전과 소유에 대한 감사를 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것들은 우리가 감사해야 할 것들임에는 틀림없다.
문제는 이 소유와 안전은 사라질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이다.
또 나중에는 결국 사라질 수 밖에 없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우리가 알야할 것은 이런 것들을 뛰어넘는 가장 큰 기쁨인 구원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감사하다고 할 때 그 구원의 사건이 제일 먼저 떠오르지 않는다면 어쩌면 구원을 잘 모르고 있는 것일수도 있다.
그냥 내 삶에 와닿는 소유와 안전이 더 감사한 것으로 느껴진다면 말이다.
비유적인 예를 한 번 들어보자.
어떤 젊은 여자가 조퇴나 휴가를 잘 허락하지 않는 빡세게 일시키는 한 회사에 다니고 있다고 하자.
그런데 어느 날 엄마한테서 갑자기 전화가 왔다.
그리고 하는 이야기가 엄마가 오는 길에 차에 치일 뻔 했는데 어떤 남자분이 엄마를 밀쳐내서 구하고 대신 차에 치여 지금 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병원에 가려고 하는데 엄마 혼자 힘드니 네가 같이 가서 그 분을 뵙고 위로하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딸은 사정을 직장상사에게 설명하고 조퇴허락을 받아 엄마와 함께 병원에 가서 엄마를 구하고 대신 다친 남자분을 만났다.
그러면 그 딸은 남자 분에게 뭐라고 말을 했겠는가?
“우리 엄마를 구해주셔서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우리 엄마 대신 이렇게 다치셔서 너무나 죄송하고 어떻게 감사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빨리 쾌차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말해야 정상일 것이다.
그런데 그런 말 대신에 “선생님 덕분에 오늘 회사 일 반 밖에 안하고 조퇴할 수 있었습니다. 조퇴 잘 안시켜주는 회사인데 덕분에 오늘 여유시간을 더 갖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런다면 제 정신이겠는가?
자신의 입장에서는 조퇴한 것이 감사할 이유가 될 수는 있겠지만 더 본질적이고 중요한 것은 자신의 엄마를 살려주셨다는 것이다. 그것이 제일 감사해야 할 이유이다.
마찬가지로 소유와 안전이 감사한 일은 맞다.
그러나 이렇게 사라질 것들이 아니라 우리한테 영원한, 너무나 감사한 사건을 주셨고 그것이 바로 구원이다.
그런데 감사의 기도를 할 때 이것이 안떠오른다면 어쩌면 우리가 이 사건을 아직 잘 모르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2) 삶에 자발적 불편함이 있는가?
우리가 예수님을 진짜 믿고 나면 그냥 사는 것이 아니라 그게 너무 감사해서 어떻게 내가 해야할까?를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예수님께 “제가 감사한데요 이제 어떻게 제가 해야되죠?”하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 하신다.
“고마우면 나에게 뭘 하려고 하지말고 이웃사랑을 실천해라. 내가 널 사랑한 것 처럼. 그렇게 살면 된다.”
그런데 우리는 본질적으로 이웃사랑을 싫어하는 인간들이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 보다 미워하는 것이 더 익숙한 인간들이다.
그래서 억지로라도 내 삶을 불편하게 틀어가지고 이웃사랑을 하고 하나님 사랑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규칙이기 때문에?
아니다. 십자가의 구원이 너무 감사하기 떄문이다.
그런데 내 삶의 하루, 일주일, 한달을 떠올려 보았을 때, 내가 하기 싫지만 억지로라도 감내하고 있는 이웃사랑이 없다고 한다면 어쩌면 그 감사를 모르는 사람일 수도 있다.
예를 들어보자.
내가 차에 치일뻔 했는데 어떤 청년이 나를 구하고 대신 차에 치여 다쳤다.
그래서 그 청년에게 너무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그리고 어떻게 보답하면 좋을지를 물었다.
그러자 그 청년은 자신이 원래 토요일마다 고아원 봉사를 했는데 이렇게 몸을 다치는 바람에 봉사를 갈 수 없게 되었으니 혹시 자기 대신 가줄 수 있는지를 물어왔다.
그렇다면 아마 당연히 간다고 할 것이다. 무슨 큰 일도 아니고 말이다.
그런데 봉사가 의무라서 가는 것인가?
아니다. 그 청년에게 너무 감사해서 일 것이다.
토요일 놀고 싶지만 그 감사함 떄문에 자발적 불편함으로 봉사를 갈 것이다.
그런데 만약 그 봉사를 거부하고 안간다면 그 청년에게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지 않다는 표증이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명령하셨던 이웃 사랑을 향한 불편함이 없다고 한다면 어쩌면 내가 아직 구원을 모르는 것일 수도 있다.
솔직히 이 부분은 나 스스로도 아직 자신이 없다.
오해하지 말 것은 이 질문을 통해서 결심하라는 것이 아니다.
“내가 기도하는데 구원에 대한 감사를 먼저 고백하지 않았군. 그럼 이제 부터 그렇게 해야지.”
“내 삶에 자발적인 감사함이 없었네. 앞으로는 그렇게 해야지.”
이렇게 결심하라는 것이 아니고 원래 그게 정상이라는 것을 깨닫자는 것이다.
원래 자연스럽게 이런 모습이 나와야 하는데 그게 아니었다면 나를 점검해 봐야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바리새인적으로 율법을 지키듯이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자연스러운 믿음의 상태로 이러한 모습이 나오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 자신이 어쩌면 어쩌면 아직 복음을 믿는 사람이 아니라 그냥 아는 사람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좀 깊히 보자는 것이다.
그래서 “진짜 복음을 제대로 알아 볼 필요가 있겠다.”, “복음을 공부해 볼 필요가 있겠다.”, “진짜 원래 복음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겠다.” 하는 되새김을 해보자는 것이다.
지적과 반성의 말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으면서, 교회를 다니면서 정말 행복했는지를 되돌아 보자는 것이다.
교회에 나와서 이것 저것 봉사도 하고 예배도 드리고 하는데 딱히 하나님을 믿는 것에 대한 기쁨과 감격 같은 것은 잘 모르겠고 하나님을 안믿는 사람들 보다 딱히 더 잘된 것도 없는 것 같고 한다면 아직 올바른 믿음을 잘 몰라서 일 수 있다.
그래서 그것을 함께 알아가보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진짜 기쁘게 하나님을 믿어 보자는 것이다.
더 이상 교회가 노동하는 공간, 헌신하는 공간, 그런 공간이 아니라 노동하고 헌신 하더라도 내가 기뻐서 하는 그런 느낌을 느껴보자는 것이다.
예수님을 영접하면서 마르다는 영접준비를 하는 노동으로 분주 했으나 자기를 도와주지 않고 예수님 앞에서 말씀을 즐겨듣고 있는 동생 마리아를 탓하며 짜증을 내었다.
“마리아에게 저 좀 도와주라고 해주세요.”하고 마르다는 예수님께 요청을 했으나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적당히 해라 마리아야. 마리아가 내 말을 듣는 것이 더 중요하고 가치 있는 일이다.”라고 말씀 하신다.
즉 복음을 듣고 참 믿음으로 들어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씀 하신 것이다.
말씀을 들은 후에 마리아가 어떻게 예수님과 제자들을 영접 하는 일을 했을까?
짜증을 내는 마르다와는 달리 기쁜 마음으로 영접하는 일을 했을 것이다.
우리는 혹시 짜증을 내는 마르다와 같이 교회 일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마리아와 같이 기쁜 마음으로 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신앙이 주는 행복을 정말 누리고 있는가?
아니면 뭔가 노동하듯 믿고 있는 것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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