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 점검과 다시 시작하기 6]

[믿음 점검과 다시 시작하기 6]

4장. Back to Basic (기초로 돌아가기)
어떻게 하면 우리는 진짜 믿음을 세울 수 있을까?
믿음을 만드는 재료를 생각해보면 3가지를 생각할 수 있다.
의지, 지식, 성령, 이 세가지가 믿음을 이루는 믿음의 재료이다.
(의지)+(지식)+(성령) => 믿음

1) 의지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 하느니라” (요한복음 6:28)

이 말씀은 믿음으로 은혜에 들어간다고 말하고 있다.
즉 은혜는 이미 주어져 있는데 이 은혜로 뛰어 들어가는 것은 우리의 믿음으로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믿음은 우리의 의지가 동반되는 것이다.

예를들어 누군가 나에게 택배로 선물을 보내왔다. 그 선물이 바로 은혜이다.
그 택배가 도착하여 문 앞에 그 선물이 놓여졌고 택배기사가 물건이 도착했다고 나에게 문자로 알려왔다. 자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까?
선물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의심 해야 할까?
보내온 문자는 “아마도 가짜일거야”, 또는 “아마 사기꾼이 보내온 문자일거야.” 하고 의심하고 그냥 무시한다면 그 선물은 결코 내 것이 되지 않을 것이다.
대부분은 그 문자를 보면 “어? 선물이 왔다고? 정말?” 하고 확인하기 위해 대문을 열고 그 선물이 있는지 확인할 것이다. 그리고 선물을 발견하면 선물상자를 집어들고 집으로 들어올 것이다.
즉 선물에 대한 나의 자유의지의 행위, 즉 대문을 열고 선물을 확인하고 선물을 집어들고 집으로 들어오는 나의 의지의 행동이 동반될 것이다.
그래서 집으로 가져들어 온 선물 포장을 뜯고 그 선물을 확인하는 순간 내가 그 선물을 받았다는 사실을 믿게 되고 손에 쥐면 비로서 그 선물이 내 것이 된다. 그것이 내가 그 선물을 받는 것, 바로 은혜를 받은 것이 된다.
그러므로 선물, 즉 은혜를 내 것으로 만들려면 적어도 문을 열고 선물상자를 확인하고 집어들고 들어와서 포장을 뜯는 나의 의지가 발현 되어야 한다.
소식(복음) –> 의지 –> 믿음 –> 선물(구원)

선물은 구원이요 하나님의 은혜이다.
이 구원은 믿음으로 얻을 수 있는데 이 믿음을 가지려면 적어도 이 복음에 대한 관심과 귀를 기울이고 알아보고자 하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
택배기사가 보내 온 문자는 우리가 전도 받을 때 또는 여러 매체를 통해서 복음을 듣는 것이라고 비유해 볼 수 있다.
복음을 듣고 그것을 무시한다면 구원이 자기 것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복음을 듣고 그것이 과연 무엇인지, 진리인지 관심을 가지고 “한 번 알아볼까?” 하고 뭔가를 생각한다면 그것이 바로 의지의 발현일 수 있다.
요한계시록 3:20절 말씀을 보면,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라고 말씀 하셨다.
예수님은 강제로 문을 부수고 들어 오시지 않는다.
예수님이 두드리시는 문을 우리가 열어 드려야만 들어오시는 것이다.
이 문을 여는 행위는 우리의 의지로 하는 것이다.

 

2) 지식
한국교회에는 반지성주의의 이상한 풍조가 있다.
“뭘 그렇게 따지면서 믿으려고 해? 그냥 믿으면 되지.” 그런 식이다.
그래서 이 ‘지식’이라는 것을 등한시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기독교는 단 한 번도 반지성주의로 흘러간 적이 없다.
사실 기독교는 “그냥 믿으면 돼. 열심히 믿으면 돼. 하나님에 대해서 조금 모르면 어때. 열심히 믿다보면 다 되는거야.” 식으로 진행된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을 때 ‘지식’이 중요하지 않다고 누군가 또는 교회가 말한다면 그것은 기독교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

반지성주의는 기독교 스타일이 아니다.

하나님을 그냥 막 믿으면 안된다는 것을 예수님은 오병이어 사건을 통해 보여주셨다.
올바른 복음의 지식을 통해서만 우리가 온전한 믿음을 가질 수 있다.
절대 막 믿어도 되는 것이 기독교가 아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지식’을 교회는 너무나 소홀히 하고 있으며 더구나 다음 세대에게 이 지식을 온전히 전해주는 능력이 너무나 부족하다. 그것은 기성세대 조차 이 지식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교회의 성도들이 하나님을 막 믿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누군가 나에게 와서 A라는 사람이 매우 고마운 사람이라면서 A에게 다짜고짜 감사하라고 한다면 감사할 수 있겠는가?
왜 그 사람이 나에게 감사한 사람인지, 그 사람이 무슨 감사한 일을 한 것인지를 알아야 비로서 감사할 수 있게 된다. 즉 감사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에 대한, 그 삶이 한 일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만 되는 것이다.

(에베소서 1:13, 새번역)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의 말씀 곧 여러분을 구원하는 복음을 듣고서 그리스도를 믿었으므로, 약속하신 성령의 날인을 받았습니다.”

성령의 날인은 우리가 성령의 소유가 되었다는 것, 즉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 가능하게 된 것은 구원하는 복음을 들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들은 구원하는 복음의 내용이 바로 ‘지식’이다.
그래서 지식은 반드시 구원의 선결조건이 된다.

 

3) 성령
그런데 사실 우리가 지식을 많이 쌓았다고 믿음을 반드시 갖게 되는 것은 아니다.
즉 성경을 아무리 잘 알아도 하나님을 믿게된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보다 성경을 더 잘 아는 비그리스도인들이 정말 많다. 그러나 그 사람들이 하나님을 다 믿지는 않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을 갖게하는 마지막 요소가 바로 ‘성령’이다.
믿음을 갖기 위해서는 성령의 도우심이 반드시 필요하다.

(고린도전서 12:3, 새번역)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에게 알려드립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예수는 저주를 받아라” 하고 말할 수 없고, 또 성령을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는 주님이시다” 하고 말할 수 없습니다.

즉 성령을 힘입지 않고서는 믿음을 고백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의 지식을 믿음으로 만들어 주시는 분이 바로 성령인 것이다.
우리 주변에 그런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야, 믿고 싶은데 나는 진짜 안믿어져.”
많은 사람들의 경우, 복음에 대한 지식을 쌓은 후에 그것이 정말 믿어지는 진짜 믿음을 갖게 된 시점 사이를 보면 대개는 간격이 있다.
어떤 사람은 그 간격이 매우 짧지만 또 어떤 사람은 매우 긴 시간이 지나기도 한다.
아마도 이런 경험을 가지신 분이 교회에 먗 분씩은 있을 듯 싶다.
대개 복음에 대한 지식을 갖게 되고 “어~ 그런 내용이구나.”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그것을 정말 믿게 되었다는 것이다.
정확히 그 시점을 알 수도 있고 부지불식간에 자기도 모르게 자신이 믿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 믿게되는 그 순간이 바로 성령께서 믿음을 갖도록 도우신 순간이다.
우리는 그것을 ‘회심’이라고 부르며 또 ‘거듭났다’고 하기도 한다.
또 하나님을 ,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다’고 표현 하기도 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겐 구원의 순간이기 때문에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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