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청년 이야기에 대한 또 다른 생각>
(마가복음 10:17-18)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공관복음인 마태복음 19:16-30과 마가복음 10:17-31, 그리고 누가복음 18:18-27에 “낙타가 바늘 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 보다 쉬우니라”라는 말씀으로 유명한 부자 청년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이야기를 우리는 보통 하나님 보다 세상 재물을 사랑하는 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이야기로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누가복음 16:3과 자주 연결시킵니다.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한국의 재벌들의 삶의 모습을 보면 이 말씀이 상당히 현실적으로 느껴집니다.
그들은 늘 습관적으로 그 재산을 불리기 위해, 또 그 재산을 잃어버릴까봐 전전긍긍하며 한 시도 그 재산으로 부터 자신의 눈을 다른 곳으로 돌리지 못하고 사는 것을 봅니다.
결국 부유할지는 몰라도 그 재산에 묶여 구원의 진리를 볼 수도, 찾을 수도 없는 삶을 사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재산을 모두 사회에 기부하고, 자식에게 회사를 물려주지도 않고 세상을 떠난 유한양행의 창업주인 유일환 박사 같은 분은 참 본받을 만한 분이 아닐 수 없습니다.
독실한 침례교 신자인 유일한 박사는 자신의 재산에 대해 자신의 소유가 아닌, 예수님이 맡기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1970년 유한재단을 설립하고 유한공업고등학교와 유한공업전문대학을 세우는 등, 교육사업에 자신의 재산을 헌납했습니다.
유일한 박사는1971년 별세하기 전, 아들 유일선 변호사의 딸의 학자금으로 쓰일 1만불을 제외한 전 재산을 교육사업에 기부한다는 유서를 남겼습니다.
바로 낙타 같은 모습으로 바늘 귀를 통과한 참 크리스챤이 아닌가 싶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부자 청년은 나름대로 영생에 대한 관심이 있고,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삶을 사는 건실한 청년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그 청년은 모든 재산을 팔고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초청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결국 그는 자신의 재물을 예수님보다 더 소중히 여겼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의 또 다른 면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먼저 부자 청년의 질문이 잘못되었다고 보는 의견입니다.
마태복음 19:16에 청년은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하고 묻습니다.
그런데 이 물음으로 부터 유추해보면, 이 청년은 영생을 얻는 길이 선한 일(계명, 울법을 지키는 일)을 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교리적으로 보면 ‘행위구원’을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마태복음 19장에 기록된 것 처럼 지켜야 할 계명들을 열거하십니다.
사실 논리적으로 말하면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면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단 한번의 실수도 없이 전 생애를 통해서 완벽히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로마서 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더군다나 예수님은 마태복음 5: 21-44에서 산상수훈을 말씀하시면서 그 율법을 더 강화시켜 더욱 지키기 어려운 율법으로 만들어버리셨습니다.
그래서 현실적으로 율법을 완벽히 지켜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인간은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습니다.
(로마서 3:10)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아마도 예수님은 부자 청년이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행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하고 질문을 했을 때 속으로 “무어라? 선한 행위로 영생을 얻는다고? 그래, 그럼 네가 얼마나 선한 행위를 이룰 수 있는지 보자.”하고 생각 하셨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청년의 질문 직후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마가 10:18)라고 하시며 오직 하나님 만이 선하실 수 있으며 인간은 선할 수 없다는 것을을 분명하게 밝히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청년은 아주 자신있게 “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데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나이까?”(마 19:20)하고 의기양양해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결정적 한 방을 내미십니다.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마가 10:21)
“네가 그렇다면 네 재산보다 하나님을 더 중히 여기고 전적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느냐?”고 청년에게 도전하신 것입니다.
이 명령 앞에 이 부자 청년은 그만 자신의 밑천을 다 드러냅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하며 의기양양했던 그는 자신의 밑바닥이 다 드러나자 근심하며 어깨를 늘어뜨리고 떠나갑니다.
저는 이 이야기의 또 하나의 숨은 의미가 ‘행위구원의 불가능’을 부자청년을 통해 말씀하시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다시말해 ‘행위구원’은 마치 부자의 재산처럼 풍부한 행위를 자랑할 지라도 낙타가 바늘 귀를 통과하지 못하는 것 처럼 불가능한 구원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어서 제자들이 한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라는 질문은 울법을 지키는 모든 사람이 구원받지 못한다는 말이 아니냐는 질문이기도 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라고 말씀 하십니다.
즉 사람이 아무리 율법을 지킨다고 하며 선한 행위를 할 지라도 인간의 능력으로 완전한 행위에 도달할 수 없으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 즉 예수님을 믿는 자를 구원하시는 일, 바로 “이신칭의(이신득의) –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을 받는다” – 의 길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나님이 하시는 구원의 은총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이 구원은 인간이 이룰 수 없으나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 일을 가능케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아마도 부자 청년이 이렇게 예수님께 질문했다면 자신의 재산에 대한 염려를 하지 않아도 되었을지 모릅니다.
“예수님, 저는 죄인입니다. 어떻게 해야 저의 죄를 용서받고 구원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한복음 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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