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는 예수님을 갈릴리 바닷가에서 처음 만난 것이 아니다> 동영상

<베드로는 예수님을 갈릴리 바닷가에서 처음 만난 것이 아니다>

 

 

(마태복음 4:18-20)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시몬 = 베드로

 

(마가복음 1:16-18)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곧 그물을 버려 두고 따르니라”

(누가복음 5:1-11)
“무리가 몰려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새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호숫가에 배 두 척이 있는 것을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그들이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이는 자기 및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으로 말미암아 놀라고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공관복음서에는 예수님과 베드로가 처음 만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 상황이 잘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임을 조금만 생각하면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만 읽어보면 예수님이 베드로와 형제 안드레에게 “나를 따르라.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하고 말씀하시자 바로 그믈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선 것처럼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건 참으로 이해되지 않는 장면입니다.
언제 봤다고 약관의 예수가 “나를 따르라”고 한다고 자신들의 생존의 방편이고 삶의 기반인 배와 그믈을 버리고, 가족(베드로는 아내가 있었습니다)과 생계를 팽개치고 선뜻 예수님을 따라나설 수 있겠습니까? 참 이해가 되지 않는 장면입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과 달리 누가복음에는 당시 상황이 좀 더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의 배를 띄우라고 말하자 베드로가 선뜻 배를 띄웁니다.
이것도 이해되지 않는 장면입니다.
젊은 청년 하나가 와서 선주인 베드로에게 배 띄우란다고 선뜻 띄우겠습니까?
‘네가 뭔데 나더러 배띄우라는 거여?” 당장 이러지 않겠습니까?
원래 배 타시는 분들은 그 험한 일의 특성 때문에 늘 신경이 서있고 오죽하면 한 성질하는 직업이라고 하면 배타시는 분들을 떠올리겠습니까?

또 말씀을 마치시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믈을 던지라고 명령조로 말합니다. 그런데 또 이상한 일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은 어부가 아닙니다. 물고기 잡는 전문가는 베드로 입니다. 그리고 이미 물고기를 잡기 위해 밤을 새워 노력했지만 물고기를 잡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포기하고 철수한 후에 이제 그믈을 정리 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듣도 보도 못한 한 젊은이가, 배를 다시 띄워서 깊은데로 가서 다시 그믈을 던지라고 하면 짜증이 밀려오지 않겠습니까?
그러러면 정리하던 그믈을 다시 배에 올리고 던질 준비를 해야되고 이미 그믈 던질 지역에 물고기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상태인데 또 더 깊은데로 배를 띄워 가라면 가지겠습니까?
아마도 “이 무슨 물고기 전문가 앞에서 헛소리야” 하고 화를 내는 것이 당연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베드로는 순순이 “말씀에 의지하여 그믈을 던지겠습니다.”하고 그 귀찮고 희망없는 짓을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명을 따라 그믈을 다시 던졌을 때 엄청난 물고기 떼가 잡혔고 이를 본 베드로가 갑자기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뜬금없이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하며 고개를 떨굽니다.

 

이것도 사실 이해가 잘 가지 않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의 신비한 능력을 목격하고 그런 것이라면 무릎을 꿇는 것 까지는 그럴 수 있다고 해도 “나는 죄인입니다”는 너무 뜬금없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몰라봐서 죄송합니다. 이 미련한 것을 용서하십시요.” 뭐 이정도 말이라면 그럴 수 있어 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에게 무슨 큰 죄를 지은 것 처럼 자신이 죄인이라고 한 것은 좀 이상합니다. 그리고 “나를 떠나소서”하고 말하는 것도 이상합니다.
그런 상황이라면 오히려 “저희들을 좀 도와주십시요. 앞으로 잘 모시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상일 것 같습니다.
혹자는 예수님의 거룩한 카리스마에 눌려 꼼짝 못하고 예수님을 따랐다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예수님의 카리스마가 그렇게 강하다면 왜 바리새인들은 그 카리스마에 눌리지 않고 오히려 에수님의 꼬투리를 잡으려고 쫒아다니고 비난을 일삼은 것인지 설명이 안됩니다.

 

그런데 이런 이상한 상황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가 요한복음에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요한복음 1:40-42)
“요한(세례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는 두 사람 중의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세례 요한의 제자중 하나가 바로 베드로의 형제인 안드레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오실 메시아라는 말을 세례 요한으로 부터 듣고 안드레가 베드로를 데리고 예수님께로 갑니다.
세례 요한은 예루살렘 인근 유대광야에서 주로 사역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안드레도 갈릴리를 떠나 예루살렘 지역으로 와서 세레 요한의 제자가 된 뒤, 그 사역을 돕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 역시 갈릴리를 떠나 예루살렘에 와 있습니다.
왜 베드로가 갈릴리에서 고기를 잡고 있지 않고 이 때 예루살렘에 와있는건지에 대한 이유를 성경에서는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이 때 베드로는 예루살렘 인근에서 예수님이 세례 요한으로 부터 세례를 받으신 직후 예수님을 만났고 그리고 바로 다음 날 또 제자로 받아들인 안드레와 베드로와 같은 동네 사람인 빌립과 나다나엘을 만납니다.
그렇다면 이 때 베드로가 이미 안드레, 빌립, 나다나엘과 더불어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런 상황을 놓고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대부분 가난하고 무식한 어부라는 편견을 버려야 할 것 같습니다.
당시 어부가 결코 사회적으로 낮은 위치의 사람이라고 볼 수 없고, 더군다나 배를 소유했던 베드로는 더더욱 가난한 무리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당대 최고의 선생으로 여겨지던 세례 요한의 제자라면 무식한 어부가 아니라 지적으로 진리를 찾아다니던 젊고 의식있는 젊은이들 이었다고 보는게 더 타당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생업인 어부의 일도 그만두고 세례 요한의 곁에 모여 제자가 되어 있던 것이 아닌가 추측됩니다. 베드로 역시 그러한 무리의 하나이기에 어부일을 놓아두고 예루살렘까지 올라와 있었던 것 아닌가 생각됩니다.

자, 그렇다면 이제 베드로가 예수님을 이미 만났고 정식이든 아닌든 예수님의 제자 그룹에 이미 속했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베드로가 갈릴 바다에서 다시 어부일을 하다가 예수님을 만나는 일이 벌어집니다. 그것이 바로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 기록된 장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요한복음과 공관관복음 사이에 시간적 간격이 생깁니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무슨 일이 있었길래 갈릴리 바다에서 베드로가 다시 에수님을 만났을 때 무릎을 꿇고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고백을 예수님께 했던 것일까요?
여기에 대한 정보는 성경에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이 제 독자반응비평의 상상으로 이 간극을 메꾸어 볼 수 있습니다.

(※ 독자반응비평이란 저자가 무슨 의도로 글을 섰건, 그 글로 부터 독자가 받은 생각, 감동, 영감이 중요시하는 또 하나의 문학비평 부분입니다. 가끔 저자의 이런 글 맺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제 이 글은 나의 손을 떠났다. 이 글을 읽고 독자가 느끼는 모든 감정이나 영감, 그리고 마지막 결론은 이제 전적으로 독자의 몫이다.” 뭐 이런 것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간극을 거룩한 독자반응비평적 상상력으로 누구나 이 간극을 메꾸는 스토리를 만들어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어쩌면 우리에게 이성적으로 성경의 네러티브를 합리화 시키는 개인적 노력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증명될 수 는 없는 것이지만 말입니다.

제가 가장 동의하는 스토리는 이런 것입니다.
몇 명의 제자들과 함께 예수님의 제자가 된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그 가르침을 받기 시작하며 제자로서의 자리를 잡아갑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2장에 나오는 가나의 혼인잔치까지 따라가서 예수님의 공생애 첫 기적을 목격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행동으로 인해 베드로는 어떤 위험성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그 일은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 성에 올라갔을 때 발생 했습니다.
요한복음 2장에 보면 공생애 초기인 가나의 혼인잔치 기적후, 예수님은 곧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 곳에서 채찍을 만들어 후려치면서 성전 상인들의 상들을 둘러엎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예수님이 성전청결 사건을 일으키신 것은 한 번이 아니라 공생애 초기와 공생애 마지막, 두 번에 걸쳐 일어난 것으로 사복음서에는 기록되어 있습니다.

베드로는 이 성전청결사건을 맏딱뜨리고 아마도 상당한 위협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야, 이 양반 따라다니다가는 이거 잘 못하면 뼈도 못추리는 일을 당할 것 같은데….” 아마 이런 생각을 했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어느 날 베드로는 더 이상 안되겠다 하고 야반도주하여 갈릴리로 되돌아 옵니다.
“야, 진리고 뭐고, 그냥 물고기나 잡고 사는게 속 편하겠다.”라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스승이었던 예수님이 갈릴리 바다, 바다 베드로 앞에 나타난 것입니다.
베드로는 어쩔 줄 몰라했을 겁니다. 스승으로 부터 도망쳐 왔는데 그 스승이 갑자기 자기앞에 나타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아무 말없이 “배 좀 띄워라”하니 꼼짝없이 배를 띄웠고, 깊은데 가서 그믈을 던져라 하니 순순이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믈을 던지겠습니다”하고 바다로 다시 나가 그믈을 던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믈에 엄청난 물고기 떼가 잡힌 것을 보고 그만 예수님의 권능을 다시 꺠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 에수님의 배반하고 도망쳐 온 자신의 죄를 깨닫고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예수님께 “저는 죄인입니다. 그냥 저를 버리십시요.”하고 참회의 고백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다시 나와 함께하자”는 예수님의 권유에 그만 감복을 하고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를 용기가 생겼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타당성이 있는 배경을 생각해 본다면 사복음서의 기록이 그렇게 이상한 기록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스토리는 성경이 아닙니다.
주어진 성경정보를 가지고 논리적으로 그 상황을 그려보고 요한복음과 공관복음의 간격을 메꾸어 본 것입니다.
이것은 개인적 상상일 수도 있고 어쩌면 실제 상황이었을지도 모르는 이야기 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이렇게 사복음서 전체를 비교해 보면서 읽으면 이해가 되지 않던 부분도 그럴 수 있었겠다는 이해와 함께 답답함을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개인적 상상을 하기 전에 이미 해석되어 있는 전통적 해석이 무엇인지를 먼저 반드시 확인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홀로 이단이 될 수도 있으니 이러한 것도 성서전문가들의 의견을 따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예수님과 베드로의 만남은 갈릴리 바다가 처음이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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