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쟁이 그레데 사람들 : ‘에피메네데스의 패러독스’>
(디도서 1:12-13a)
“그레데인 중의 어떤 선지자가 말하되 그레데인들은 항상 거짓말쟁이며 악한 짐승이며 배만 위하는 게으름뱅이라 하니 이 증언이 참되도다”
디도서 1:12절에서 바울은 그레데 사람들은 항상 거짓말쟁이며 악한 짐승, 배만 위하는 게으름뱅이라고 매우 비난하며, 그레데에서 사역하는 디도에게 그레데 사람들을 만만히 보지말고 조심해서 사역할 것을 충고합니다.
그레데는 그리스 남쪽의 가장 큰 섬인 ‘크레타(Crete)’섬을 지칭합니다.
바울이 12절에서 한 말은 사실, 바울이 한 말이 아니라, 그레데 출신의 시인인 ‘에피메네데스’가 한 말입니다.
12절에서 ‘그레데인 중의 어떤 선지자’라고 지칭한 인물이 바로 ‘에피메네데스’입니다.
‘에피메네데스’는 실존인물로, 바울보다 약 600년전에 그레데에서 태어난 인물로, 그가 쓴 ‘크레티카’라는 작품에 바울이 인용한 12절의 문장이 나옵니다.
이 그레데 사람들의 성향이 얼마나 세속적이고 술 수에 능한 사람들이었는지, 그레데 출신이었던 에피메네데스는 물론 바울까지 그들을 거짓말쟁이라고 한 것을 보면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에피메네데스의 말은 바울 외에도 철학자들이 논리학을 말할 때 ‘에피메네데스의 패러독스’로 부르며 거론하는 매우 유명한 말입니다.
그것은 그레데 출신인 에피메네데스가 그레데 사람들을 거짓말쟁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말한 ‘그레데 사람은 거짓말쟁이다’라는 명제가 참이라면, 그레데 사람인 에피메네데스도 거짓말쟁이가 됩니다. 그러면 에피메네데스가 한 말인 ‘그레데 사람은 거짓말쟁이다’라는 말이 거짓말이 되며, 이에 따라 그레데 사람은 거짓말쟁이가 아니고 참 말을 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그레데 사람들이 참 말을 하는 사람이라면, 그레데 사람이 에피메네데스가 한 말인 ‘그레데 사람은 거짓말쟁이다’라는 것이 참 말이 되어, 다시 그레데 사람은 거짓말쟁이가 되고, 그레데 사람인 에피메네데스는 다시 거짓말쟁이가 되고 그가 한 말은 다시 거짓말이 됩니다.
그래서 논리적으로 끝없는 반복이 발생되기 때문에 이것을 ‘에피메네데스의 패러독스’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바울이 13절에서 “이 증언이 참되도다”라고 한 것을 보면, 그레데 사람들은 다분히 이런 좋지 못한 성향의 사람들이었음이 분명해 보입니다.
세상은 이런 ‘에피메네데스의 패러독스’ 처럼 끝없는 패러독스의 반복처럼 보입니다.
세상의 어떤 문제를 바로잡은 듯 해보이면 그 여파로 다시 다른 문제가 발생하고, 그 문제를 해결한 듯 보이면 또 다른 문제가 일어납니다.
늘 산 넘어 산이고 물 건너 물입니다.
한 목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런 문제의 반복은 이유가 있다. 사람이 사람의 문제를 고치려고 하기 때문이다.
사람 속에 있는 문제를 사람이 지적하고 고쳐나가려는 노력은 끝내 성공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 문제를 바로 잡으려는 사람 역시 똑같은 문제를 지닌 존재이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교회에서 “A집사는 욕심이 너무 많아.”라고 비난했다면, 그 순간 저는 ‘에피메네데스의 패러독스’에 빠지고 맙니다. 왜냐하면 저 역시 욕심이 많은 인간중에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에피메네데스의 패러독스’는 해결될 수 없는 것일까요?
해결방법은 에피메네데스가 그레데 사람이 아니면 됩니다.
그러면 ‘에피메네데스의 패러독스’는 깨지고 그의 말은 참 말이 되어 끝납니다.
그러나 이미 에피메네데스는 그레데 사람이라고 확인하였기 떄문에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또 하나의 방법은 에피메네데스가 그레데 사람이지만 동시에 그레데 사람이 아니면 됩니다.
이게 무슨 소리냐 할 수 있겠지만, 시민권자로 캐나다에서 태어난 2세대 자녀들의 입장이라면 한국인의 뿌리를 가진 분명 한국인이지만 법적으로는 캐나다인 입니다.
어쩌면 정서상으로도 캐나다인 일 수 있습니다.
그런 입장이라면 한국인으로서 말을 할 수도 있고 캐나다인으로서 말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입장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에피메네데스의 패러독스’는 깨질 수 있습니다.
인간이 인간의 세상문제를 해결할 수 없고 끝없이 ‘에피메네데스의 패러독스’에 빠져, 문제와 문제의 굴레 속에서 허덕이는 것은 인간이 인간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존재가 있습니다.
바로 인간이면서 인간이 아닌, 인간이면서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에피메네데스의 패러독스’ 처럼 모순으로 가득찬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이 바로 이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는 분이시며, ‘에피메네데스의 패러독스’ 를 깨실 수 있는 분입니다.
베들레햄 말구유에서 태어나신 예수님은 분명히 사람으로 이 땅에 오셨지만, 성경이 말하듯,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 이시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놀랍게도 에피메네데스와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요한복음 7:7)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아니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일들을 악하다고 증언함이라”
예수님은 “세상의 일들이 악하다”라고 말씀 하십니다.
예수님이 단지 인간이라면 세상의 일들에 속한 예수님의 말은 에피메네데스의 패러독스에 빠져버립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간이 아닌 하나님이시기에 이 패러독스에 빠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직 예수님만이 “세상은 악하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라고 선언하실 수 있습니다.
세상에 속한 그 누구도 사실 타인의 죄를 지적할 자격이 없습니다.
인간 모두 악한 존재이기 떄문입니다.
남의 죄를 지적할 수도 없고, 또 같은 죄인의 입장으로 남을 죄로 부터 구원할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세상의 죄를 지적하실 수 있고, 또 세상을 죄로 부터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에피메네데스의 패러독스를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인간이면서도 마치 에피메네데스의 패러독스를 벗어난 것 처럼 “이 증언이 참되도다”라고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주님의 외침을 대변하는 대변자였기 때문입니다.
즉 그의 말은 주님의 말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실제로는 선지자가 아닌 에피메네데스를 ‘어떤 선지자’라고 부른 것 같습니다.
아마도 주님의 말을 대변하는 선지자의 말과 같이 에피메네데스의 말이 주님의 말에 일치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바울은 이렇게 그레데 사람들을 맹비난하며 디도를 조심시키는 것으로 디도서를 시작하지만, 뒤에서, 이렇게 에피메네데스의 패러독스를 벗어나는 예수님이 그레데 사람들을 포함한 세상 사람 모두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음을 분명히 밝힙니다.
(디도서 2: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고 바울은 우리도 전에는 그레데 사람들과 마찬가지 였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긍휼하심 가운데 받은 은혜로, 영생의 소망을 얻었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그레데 사람들과 함께 세상 사람 모두, 그 은혜 가운데 있기를 소망합니다.
우리도 이 은혜를 잃지말고 끝까지 바울과 같은 소망 가운데 살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디도서 3:3-8)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하지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여러 가지 정욕과 행락에 종 노릇 한 자요 악독과 투기를 일삼은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였으나,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이 나타날 때에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 성령을 풍성히 부어 주사
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이 미쁘도다 원하건대 너는 이 여러 것에 대하여 굳세게 말하라 이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조심하여 선한 일을 힘쓰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아름다우며 사람들에게 유익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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